무엇이 파시즘이 아닌가

파시즘 - 10점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교양인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때였다. 광화문교보문고에 갔다가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박근혜를 지지하는 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이 문재인 시대에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박사모들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2005년에 나온 책을 역주행시키다니 대단하다.

책 자체는 좋다는걸 알고 있었고, 또 문재인정부(와 지지자)가 정말 파시즘적인 흐름을 보인다면 어떡하나, 아니 박근혜야말로 파시즘적이지 않았나. 최소한 박정희 정부는?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보자고 맘 먹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교양인 출판사에서 한권을 보내줬었는데 후배기자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서점에서 한권 샀다.

본문만 490쪽, 주석과 인덱스가 100쪽이 되는 두꺼운 책이지만 생각보다 잘 읽혔다.

로버트 팩스턴은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만이 오로지 파시즘의 전형이라는 입장이다. 책은 나치와 파시스트당이 탄생부터 집권, 전쟁과 학살을 거쳐 소멸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며 이들이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군사독재 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과는 어떻게 다른지 비교한다. 그러면서 파시즘이란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가능한 독재의 한 형태이지만, 일반적인 독재정권을 파시즘이라고 불러선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

책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하면 이렇다.

파시즘이 군부독재나 권위주의 등 다른 우익 독재정치와 다른 점은 대중을 적극적으로 동원해 팽창주의적인 정치를 펼친다는 점이다.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도자는 신적 아우라를 지닌 인물로 연출된다. 대중의 열광이 이런 파시스트 지도자에게 힘을 부여하게 된 것은 20세기의 대중민주주의 덕분이었다. 여기까지가 파시즘 1단계다. 

전통적인 지배세력 즉 정치귀족과 경제적 부유층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파시스트 지도자와 타협하며 파시즘 정권에 길을 터준다. 대중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다. 1단계에서 사회주의 못지 않은 공동체주의와 공동체 경제를 역설하는 파시스트 정당은 여기서 이념적으로 변화를 보인다. 열광과 퍼포먼스는 남아 있지만 경제정책은 우왕좌왕하고 정치제도는 1당독재로 치닫는다. 1단계에 동참했던 열정적 파시스트들이 떠나거나 숙청당한다.

3단계는 전쟁과 학살이다. 1,2단계를 거치며 집권한 파시스트 정권은 열정과 퍼포먼스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극장국가의 성격을 띄게된다. 마치 자전거가 앞으로 굴러가야만 넘어지지 않듯이 파시스트 정권은 대중의 흥분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만 정치경제 부르주아를 압도하는 힘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선택한 것이 학살과 전쟁이다. 결국 파멸을 불러온다.

군부독재나 권위주의 정권은 대중을 수동적인 피통치자로 머무르게 하는 방안을 선호하고, 1당독재가 아니라 관료와 종교, 문화 등의 영역이 사적 영역과 함께 자율적으로 통치에 협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유지한다. 이 때문에 3단계 파시즘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파시스트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또 파시즘적인 정치세력 역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찾을 수 있다. 1단계 파시즘이다. 문제는 2단계와 3단계로 전진하느냐다.

로버트 팩스턴은 대중이 독재자의 호출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현상과 파시스트 정당이 국가체제는 물론 사적인 영역까지 모두 통치하려한 점을 파시즘의 특징으로 꼽는다. 

SNS시대가 되면서 정치담론도 SNS를 통해 예전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널리 빠르게 전파된다. 나꼼수 현상이 그렇고, 문재인정부 집권뒤 급속히 떠오른 '한경오 혐오' 현상 역시 그렇다. 박사모의 활동도 아마 카카오톡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조직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독재자가 대중을 호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이 파워풀한 지도자를 요구하는 형태로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2단계, 즉 실제로 그런 형태의 파시즘세력이 집권을 하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기 힘들다고 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시대에는 소련의 등장이라는 사회주의 공포가 있었기에 경제-정치 기득권 세력들이 대중을 달래주기 위한 타협책을 찾아 파시스트들과 손을 잡았지만 지금은 그런 동력이 없다. 또 아무리 SNS시대라고 해도 엘리트들은 대중의 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댓글부대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우정치를 적절히 이용하는 방안을 찾는데 더 능숙해졌다.

결론.

문재인정부는 파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촛불혁명을 강조하면서 직접민주주의와 대중의 힘을 강하게 의식하지만 1당독재나 자신들의 정권 팽창을 위해 국가자원을 동원하는 방식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탈권위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다만 맹렬한 추종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더 큰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 주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히려 히틀러처럼 게으르면서 퍼포먼스를 중시했던 박근혜의 통치스타일이야말로 파시스트적이었다. 허나 그는 경제권력을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했지 자신(과 자신의 정당)의 통치를 확대하기 위해 동원하려는 생각은 못했다. 파시즘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기엔 그의 언변이 너무나 모자랐다. 결정적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한이라는 존재는 조롱거리였지 대적이 되는 지도자를 추종케 만들 정도로 실질적인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며, 세월호 참사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박의 허술한 통치는 그에게 반대하는 대중이 더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책의 몇구절들.

"한창 세력을 떨치던 때의 파시즘은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그 이전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던 사적인 영역을 크게 줄였다. 파시즘은 시민권의 행사를 헌법상의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것에서 지지와 순응을 위한 대규모 기념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서 공동체의 이익 밖에서는 개인이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게 했다. 또 완벽한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과 국가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파시즘은 그때까지 유럽에서 전쟁이나 사회 혁명 중에만 나타났던 공격적 감정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 자본가들과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모, 동조, 적대의 복잡한 관계를 상세히 살펴본다면 파시즘을 단순히 보수주의의 근육질적 형태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43쪽)

"카리스마의 기본은 자기가 인민의 의지의 체현이자 인민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기존의 독재자들에게서도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는 있다. 또 윈스턴 처칠, 샤를 드골,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 중에도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은 있었다. 장례식에 모인 군중의 광적인 흥분 상태로도 알 수 있듯, 스탈린 또한 분명히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역사적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역할을 공산당과 나누었다. 그 때문에 스탈린 사후 새 지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수많은 음모와 살인이 저질러졌지만 공산당의 존재는 권력의 계승을 가능케 했다. 그에 비해 파시즘의 지도력은 어떤 통치형태보다 카리스마에 의존하는데, 지금까지 파시즘 정권에서 권력이 승계된 예가 한번도 없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288쪽)

"파시즘 통치를 폴리오크라시(polyocracy),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여러 세력이 권력 중심을 이루어 항구적인 경쟁과 긴장관계 속에서 협력하는 통치 형태라고 보는 해석이 등장했다. 폴리오크라시에서는 저 유명한 영도자 원리가 정치사회적 피라미드를 단계별로 내려가며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홉스적 세계에서 작은 총통과 두체들을 수없이 양산한다."(289쪽)

"파시즘 정권들이 사적인 영여고가 공적인 영역의 경례를 너무나 급진적으로 바꾸어버린 나머지 사적 영역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나치정권의 로베르트 라이 노동부 장관은 나치 국가에서 유일한 사적 개인은 잠든 사람 뿐이라고 말했다."(326쪽)

"권력을 잡은 파시즘은 하나의 합성물과도 같다. 다시 말해, 파시즘은 보수주의자와 국가사회주의자, 극우파라는 각기 다르지만 못 어울릴 것도 없는 세 성분이 자유로운 제도와 법치를 희생해서라도 활력이 넘치는 순수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공동의 열정과 거기에 걸맞은 공동의 적을 매개로 하여 한데 결합한 강력한 합성물이다. 그 혼합비율은 선택 동맹 타협 경쟁 등 온갖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타난 결과이다. 운동하는 파시즘은 고정된 본질이라기보다는 여러 관계들의 그물에 가까워 보인다."(464쪽)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세월호 7시간, 박근혜 청와대의 거짓말

아래한글로 전자책 만들기 hwp2epub

“저도 노래 잘하는 사람이 부러워요” 테너 박현재 서울대 교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