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암 이야기


CNN기자였던 옥타비아 나스르가 그녀의 블로그에 쓴 레바논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두 가정 모두 레바논 출신이지만, 팔레스타인 국적을 선택하느냐 이스라엘 국적을 선택하느냐 하는 순간적인 차이 때문에 인생이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옥타비아 나스르는 CNN 중동 담당 기자였으나 트위터에 헤지볼라에 동정적인 의견을 썼다가 해고당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중동과 이스라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또 다른 시각을 접한다고 아니 낯선 세상을 접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읽어보세요. 

A Tale of Two Maryam’s

Octavia Nasr
이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직 영국의 통치에 있던 시대에 시작된 실화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사이의 국경은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았다. 시리아, 당시의 요르단 그리고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삶은 단순했고 인생의 결정도 순식간에 이뤄졌다. 때론 그 결정이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은 몇주 혹은 몇달간의 기본적인 일들을 일러줄 뿐이었다. 몇년, 몇십년의 일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사람의 인생, 혹은 몇대에 걸친 삶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옛날 사람들은 꿈속에서라도 인생이 앞으로 꼬이고 바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레바논의 르베이쉬라는 남쪽 마을에 마리암이라는 젊은 여인이 살았다. 그는 이웃 북쪽마을 팔레스타인의 케프르 비렘에 사는 착하고 부지런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한 두 사람은 1946년 쌍둥이를 낳았다. 인생의 첫 도전은 1948년 닥쳤다. 이스라엘 건국이 공식 선포됐고 모든 국경은 가로막혔다. 마리암은 쌍둥이를 데리고 레바논의 가족을 방문하러 갔다가 남편과 헤어졌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수 있었다.
시아버지가 마리암과 두 아이를 데리러 나귀를 타고 숲을 지나 왔다. 마리암의 어머니는 딸을 홀로 보내는 것이 걱정이 됐다. 마리암의 동생이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지라를 함께 보냈다.
그렇게 그 순간에 두명의 레바논 여성이 이스라엘에 들어섰다.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고, 다시는 레바논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군대는 케프르 비렘을 파괴해 그 지역의 모든 기독교인을 내쫓았다.
오늘날까지 4대에 걸쳐 케프르 비렘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가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스라엘은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묘지를 방문하려는 사람에게만 통행을 허락하고 있다. 그곳에 있는 건물이라곤 교회 뿐이다. 그 교회는 오래전 이 곳에 살았던 이들이 죽어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마리암과 나지라는 팔레스타인 남편들과 같이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했다. 남편의 고향에 남기 위해서였다. 마리암과 나지르의 가족은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이들은 지금도 이스라엘계 아랍인으로서 그들의 뿌리를 잊지 않으며 살고 있다. 이스라엘 국적을 가졌기에 마리암과 나지라는 부모가 사는 레바논을 방문할 수 없었다. 6일전쟁 직후 요르단 국경에서 서로 마주보며 확성기로 대화한 적이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경험은 너무가 고통스러웠기에 다시 그런 만남을 재현할수도 없었다.
마리암과 나지라는 그렇게 하루하루, 해를 보내며 고향 멀리서 인생을 보냈다. 팔레스타인인인가? 아니다. 아랍인인가? 아니다. 이스라엘인인가? 아니다. 두 레바논 자매는 르베이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쫓겨났고 인생의 잔인한 바람에 던져져 두 발로 살아갔다.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강한 가족을 가꾸었다. 운명의 손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 했다. 언론을 통해 고향 레바논의 소식을 늘 접하면서 고국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정작 사랑하는 가족의 소식에는 늘 목말랐다. 그들은 늘 잠깐이라도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했다. 부모는 돌아가셨고 그곳의 형제자매들도 자랐지만 레바논을 다시 보고싶다는 자매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리암은 1996년 숨졌다. 몇년 뒤 나지라도 언니 뒤를 따랐다. 이 두 자매의 이야기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을 사랑했던 친척과 이웃, 친구, 자녀와 손자들은 기억했다. 르메이쉬 국경 양쪽을 향한 이들의 사랑과 그리움을.
마리암의 이야기는 조국이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레바논 사람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애국심이라는 것은 당연한 선물처럼 주어져 있다. 애국심을 빼앗긴 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 자신의 나라라고 부를 곳을 가지길 열망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매일 밤 바로 코 앞에 두고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의 꿈을 꾸는 고통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이 이야기를 읽고 눈을 뜨기 바란다. 나머지 다른 이들은 마리암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레바논 여성에게 경의를 표하며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 돌아보기 바란다.

2.
마리는 하이파가 고향인 아름다운 팔레스타인 여인이었다. 1930년대 젊은 여자들이 그랬듯이 좋은 남자를 만나 가족을 가꾸는 것이 꿈이었다. 그녀가 만난 요세프는 레바논 브카씨네(Bkassine) 출신이었다. 요세프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당시 영국 규율로는 팔레스타인에 이주해온 사람은 팔레스타인 국적이나 자신의 레바논 국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중국적은 허용되지 않았다. 요세프의 가족은 이미 그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어 팔레스타인 국적을 선택했다. 
마리와 요세프는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운명이 닥쳐왔다. 마리가 병이 들어 숨졌다. 아직 어린 나이였다. 1년쯤 뒤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리 정책이 채택됐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분할한 것이다. 아랍국가들은 분리 정책을 거부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전세계가 창끝을 겨눈 듯한 분리 정책에 저항했다. 학살이 일어났다. 곳곳이 피에 잠겼다. 어떤 곳은 조용히 정리됐다.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전, 팔레스타인 가정은 '임시로' 그 지역을 떠나라고 권유를 받았다. 인근 나라로 갔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젊은 요세프는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레바논으로 가서 기다렸다. 아내를 잃고 고향을 떠난 요세프는 돌아갈 기약이 멀어지면서 점점 쇠약해졌다. 우울과 질병에 시달리다 결국 숨졌다. 남겨진 아이들은 자비로운 친척들이 돌봐주길 당부했다. 친척들은 그러나 동정적이지 않았다. 막내는 8살, 첫째는 14살 쯤이었다. 12살 딸이 밤마다 다른 형제자매를 지켜주었다. 낮이면 14살, 10살 아들은 일하러 갔다. 친척 어른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하라며 그러려면 첫째가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일을 해서 형제자매들을 먹여살릴수 있다는 것이다. 친척들은 시장에게 생선이 있는 식사를 대접하며 50파운드를 주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10살 아이는 불법적으로 일해서 돈을 모았다. 아, 아이가 50파운드를 모았을 때 비용은 500파운드로 늘었다. 몇년 뒤 500파운드를 모았지만 국적변경은 금지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레바논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레바논 여성은 자신의 국적을 배우자나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이 젊은이와 가족이 겪은 고통은 한줄로 설명하기 어렵다. 수천명이 같은 처지에 있었고, 더 나쁜 경우도 있었다.

마리의 자식들은 1명을 빼고 모두 호적도 없이, 학교도 못가보고 어릴때부터 일하며 고아처럼 가난하게 자랐다.  이 아이들이 가진 유일한 기록이라고는, 어린 소녀가 기억해낸 부모의 이야기와 자신들이 겪어온 고생들 뿐이었다. 
누가 마리의 아이들이 레바논의 악명높은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바깥에서 자란 첫 팔레스타인 난민 1세대라 생각했을까. 이 아이들은 레바논에 자랑스럽게 왔었다. 원래 레바논의 핏줄이었기에. 먹고 살만큼 돈과 재산도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레바논으로 온 다른 사람들처럼 잘 살아갈수도 있었다.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떻게 이들이 도둑질이나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선한 마음을 지닌 정직하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자랐는지도 수수께끼다. 내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당신이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영웅이었다. 세상이 그들을 쇠사슬로 묶으려 했지만 그들은 용감했고 자유로웠다. 
나는 이 이야기가 행복하게 결말을 맺었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그러질 못했다. 마리의 자녀들은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마리의 후예들은 지금 4대째 난민으로 상처를 지닌 채 살고 있다. 교육과 취업, 다른 기본적인 인권에 제한을 받고 있다.

마리는 살아서 가족을 지켜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고향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처음의 마리암 이야기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충격적이다.
두 마리암의 가족은 한명은 팔레스타인 하이파에, 또 다른 가족은 레바논에 정착했다. 이것은 고향, 애국,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영원한 자국을 남긴 순간의 결정의 의미에 관한 교훈이다.
Multi-award-winning journalist Octavia Nasr served as CNN’s senior editor of Middle Eastern affairs, and is regarded as one of the pioneers of the use of social media in traditional media. She moved to CNN in 1990, but was dismissed in 2010 after tweeting her sorrow at the death of Hezbollah’s Mohammed Fadlallah. Nasr now runs her own firm, Bridges Media Consulting, whose main aim is to help companies better leverage the use of social net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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