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독립? 그거 옛날 얘기지.

중앙은행의 통화공급을 주도한 벤 버냉키를 표지에 실은 미국 잡지.
앞에 썼던 중앙은행의 역할에 관한 이슈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역할 변화만이 아니라,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 문제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긴 합니다만, 정치적인 이슈는 늘 유동적이고 그 배경에는 수많은 힘겨루기가 있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어려워지지요.

어쨌든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정도의 상황으로 가는 것은 맞는 듯 합니다.

‘중앙은행의 제1 목표는 물가 안정이고, 이를 위해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 ‘뉴노멀’ 시대에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고나 할까요.

중앙은행도 물가보다는 경제를 살리기위한 정부정책에 동참해야 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죠.

그 결정판은 일본은행입니다.


일본은행은 22일 경기부양을 위해 인위적으로 물가를 끌어올리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요. 형식은 정부와 공동성명이었지만, 독립성을 포기하겠다는 항복선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일본은행은 물가목표를 1%에서 2%로 끌어올리면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이를 달성하겠다고 공동성명에서 밝혔습니다. 물가안정을 최대 목표로 하는 중앙은행이 일부러 물가목표를 두배 올리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지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라고 시기를 표기한 것은 화폐가치의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포기하겠다는 것처럼 읽힙니다.

물론 이런 공동선언이 아베 신조 정권의 엄포에 그칠수도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올해 국채 발행량을 법에 허용된 44조엔보다 더 줄일 것이라는 보도도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실제로 돈을 찍어내기보다는 그런 시늉만 하며 환율을 떨어트리는 선제효과, 공갈효과, 엄포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합니다.

현대의 국제금융이라는 것이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실물경제보다 심리적인 요인에 더 크게 좌우되는 점을 노린 영리한 전술일수도 있겠죠.

어쨌든,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지키려는 노력보다는 정부와 발을 맞추는데 더 노력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한국은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도 지난 14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새 정부의 정책과 최적의 조화를 찾겠다”며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같이 갈 때 효과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판도 있긴 합니다. 독일 분데스방크의 옌스 바이트만 총재가 21일(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 증시 신년 연설에서 “경제 위기 타개는 중앙은행의 핵심적 역할이 아니다”며 “중앙은행 역할을 (물가 관리로 다시) 좁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도 비슷한 얘길 했지요.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을 포기하는 모습을 독일이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두가지겠죠. 첫째는 당장 독일이 유로존 위기 속에서 다른 유로존 국가들로부터 '돈 좀 내놔라'하는 요구를 받고 있는데 이걸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통화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중앙은행적인 패러다임을 부각시켜야 하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두번째로 독일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패전국으로서 배상금을 갚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 발행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지요. 그 이후에 중앙은행을 정부에서 완전히 독립시켜 통화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맡겨서 강력하게 물가안정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확립한 나라가 바로 독일입니다.

하지만 세계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강조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평가를 더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미 2010년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 국가의 은행과 정부에 유로화를 사실상 무제한 공급하기로 했지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도 재정난에 처한 정부의 채권 매입 한도를 계속 늘리고 있구요.

세계 금융 허브의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11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새 총재로 40대 후반의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지명했습니다. 카니 총재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통화 공급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들이 경제 위기 앞에서 덜덜 떨며 이럴 때일수록 통화가치를 지켜야해...하고 있을 때 캐나다 은행은 오히려 정부보다 먼저 통화 공급을 주창했죠. 그 덕분에 캐나다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발전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캐나다 달러의 가치는 미국 달러의 약 70% 안팎이었는데, 이젠 오히려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더 쎄졌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은행에서 미국 달러를 캐나다 달러로 바꿀 때는 캐나다 달러가 더 쎄서 환전받는 금액이 줄어듭니다만, 캐나다에서 미국 물건을 살 때에는 예전처럼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더 약하게 취급 받습니다. 캐나다 사람들 입장에선 억울하겠죠. 자기네 나라 안에서 쇼핑할 때에는 화폐 강세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세계의 기축통화라는 달러와 유로, 파운드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데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HSBC의 수석이코노미스트 스티브 킹은 지난 11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더 이상 통화 정책에 정치적 중립 지대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에 나선 것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 대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질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같은 신문의 칼럼니스트인 길리언 테트는 “중앙은행의 독립은 종착역이 아니라 중간역”이라며 지금은 돈을 빌려서라도 경제를 살려야 하는 상황인 만큼 “중앙은행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애초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이라는 개념은 불변의 원칙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사실 1,2차 대전 직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독일 외에 중앙은행에 물가안정 임무를 전담시키며 철저한 독립을 보장한 사례는 금융위기 이전에도 드물긴 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 즉 달러를 가져가면 일정한 금으로 바꿔주는 화폐가치 고정 제도가 붕괴한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해 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달러화를 찍어내서 얻는 화폐발행이익, 즉 세뇨리지(seigniorage)를 누렸지만 다른 나라들도 경제성장을 높이기 위해 물가가 오르는 것은 괜찮다고 봤죠.

경제 성장을 위해 물가를 용인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 아니겠습니까. 1970년대에는 한국 경제도 빠르게 성장했지만, 물가도 빠르게 올랐죠. 이건 무슨 뜻이냐면, 성장의 혜택이 서민들에게 골고루 나뉘지는 것이 아니라 자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중됐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은 보릿고개를 벗어나 밥 굶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정도에도 충분히 만족했지만, 그러는 동안 대구의 쌀집(삼성), 서울 청량리의 자동차수리점(현대)은 거대한 재벌로 성장했지요. 이런 말을 하면 반재벌론자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생각해도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업을 키워야하는 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대기업들이 "우리는 경쟁력이 있으니까 잘 나가는 것이고, 중소기업은 경쟁력이 없으니까 도태되는 것 당연하잖아"라는 식으로 기억상실증적인 말을 하지 함부로 하지 못하겠죠.

중앙은행의 독립이 잘 보장된 나라일수록 물가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

이야기가 잠시 딴데로 셌는데, 어쨌든 그렇게 중앙은행의 독립이란 개념은 현실경제에서 그리 중요하게 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금융자산이 세계적으로 증가한 90년대부터 통화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중앙은행 독립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요즘 중앙은행의 독립은 끝났다고 주장하는 파이낸셜타임스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또 발생하는 문제는 지금이 세계화 시대라는 점입니다. 한 나라의 통화 팽창은 곧바로 다른 나라의 환율 하락(화폐 가치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이나 유로존, 일본이나 영국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물가를 올리겠다고 하면, 그 충격이 전세계로 즉시 확산되는 시대라는 거죠. 1970년대, 80년대만 해도 달러나 파운드화 가치 하락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는데는 어느 정도 시차가 있었고, 그 시차를 이용해서 미국과 영국이 우선 경제를 좀 회복하면 다른 나라들은 그런 선진국에 수출을 늘려서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수는 없다, 우리도 돈 찍어!! 이렇게 일본 중국이 나서고 있고 나머지도 '이러다가 우리만 당할라' 하면서 움직이려 합니다. 바로 환율전쟁, 화폐전쟁, 통화전쟁이죠.

원래 쑹홍빙이 주장한 '화폐전쟁'은 미국이 세계 패권을 지키기 위해 달러화의 힘을 키우고 중국 위안화 같은 다른 화폐가 힘을 키워가는 것을 막는다 하는 '화폐주도권' 전쟁이었지만, 지금 세계경제에 확산되는 화폐전쟁은 서로 국제수지의 불균형 즉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화폐가치를 일부러 떨어트리는(이러면 자기네 상품 가격이 싸지고, 수입해야할 물건 가격은 비싸지니까 수출이 늘고 수입이 줄어들죠) '환율전쟁'입니다. 이걸 화폐전쟁 2.0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환율전쟁을 묘사한 다양한 일러스트


마지막으로, 여기서 또 하나 집어 봐야할 문제는 정말 화폐전쟁, 환율전쟁이 최소한 자기네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효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점입니다. 일본의 경우, 지금까지 정부가 여러가지 재정정책을 쓰면서 디플레이션을 벗어나려고 애써왔지만 실패했습니다. 정부가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으로 낮추고 돈을 풀어도 화폐량만 늘어날 뿐, 거기에 맞춰 소비가 늘고 생산이 늘어나는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요런 것을 '유동성의 함정'이라고 하죠. 심지어 일본인은 돈이 생기면 다다미 밑에 깔아둔다, 이런 얘기까지 공공연히 하는 판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다를까요? 세계 경제가 불안하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사실인데, 이걸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없이 돈만 푼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요?

아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다는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직역으로 번역하니 좀 어렵게 느껴지는데, 영어 원문은 평이하니까 어느 정도 독해가 되신다면 원문이 더 쉬울수도 있을 겁니다. 아래 제목으로 구글 검색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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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3 7:00 pm
Era of independent central banks is over
By Stephen King

Decisions are being made that are more political than economic, writes Stephen King

좋든 싫든, 중앙은행 총재들은 정치적인 난투극에 끌려들어가고 있다. 독립이 좋으냐 나쁘냐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통화정책 그 자체가 더 이상 중앙은행의 전문적인 공직자들(만)의 일이 아닌게 돼 버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는 물가 안정을 이뤄내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랬다.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자율을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이편에게 혜택을 주거나 저편에게 약간의 불이익을 줘왔다. 경기 사이클이 순환하면 이런 불이익과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다. 이런 점에서 통화정책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으로 다들 받아들였다.
이젠 아니다. 경기침체로 선진국이 불황을 겪으면서 중앙은행은 금리를 제로에 가깝게 낮출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젠 경제 회복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추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통화정책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큰 함의를 지니게 됐다. 영국의 경우 영란은행은 의회가 설정한 물가인상목표선보다 더 높은 물가도 어느 정도 용인해야 한다는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쥐어짜는 것이 실업자가 대공황때처럼 늘어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의 고결한 성직자들께서 홀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보기도 어렵게 됐다.
좀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약간 덜 명확한 효과들도 있다. 통화량의  팽창은 정부가 돈을 쉽게 모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연기금의 미래 지출(liabilities)을 위해 현재 쌓아야할 가치도 늘어나게 된다. 이러면 노동자들이 연금을 더 많이 떼이거나 연금 혜택을 줄어야 한다. 공공 연기금의 경우 세금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여 적립금을 늘려야 한다. 게다가, 양적 팽창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미 자산을 가진 나이든 부유층인데 이런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다고 쓰기보다는 그대로 쌓아두는 걸 더 선호한다.
다른 점을 살펴보자면, 통화정책은 경제 활동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부와 수입을 재분배하는 역할이 더 강하다. 중앙은행의 결정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아베 신조의 신정부는 일본은행 총재를 새로 지명하고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무도 재정의할 계획이다. 일본은행은 인플레이션 목표를 현제의 1%에서 2%로 하라는 압력을 받게될 것 같은데(이미 현실화), 이렇게 일본은행은 다른 곳의 중앙은행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하게 됐다.
적절하게 야심찬 조치로 보이긴 하지만, 야심을 발표한다고 해서 그게 다 이뤄진다고 할순 없다. 예를 들어, 애스톤빌라(영국 축구팀)의 팬들은 팀이 언젠가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형태로는 아주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일본은행이 물가 목표를 2%로 정한다고 해도, 그럴 수단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화폐 헬리콥터를 띄우는 것, 즉 재정 적자를 크게 늘리는 대신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중앙은행에 넘기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앙은행의 정치화는 완성된다. 정부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일본 국민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지는 알수 없다. 비전통적인 정책의 논리적인 확장에 따라 헬기가 뜨는 것을 볼 것인가? 그래서 물가가 다소 오르게 될 것인가? 일본은행을 재정적책의 수동적인 실행자로 보고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머지 않아 엔화는 폭락할 것이고, 과도하게 낮았던 인플레이션은 과도하게 높아지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디플레이션을 겪은 나라로선 상상하기 힘들겠다 싶지만, 20년간 중앙은행의 독립을 지켜본 지금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더 이상 독립적일수 없다. 중앙은행의 정책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한다. 그들의 결정은 어쩔수 없이 정치적이다. 정치인들이 이점을 알아챈다면, 중앙은행의 고삐를 쥐려 할 것이 뻔하다. 이 지점에서 통화 안정은 좋든 싫든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다.

The writer is HSBC Group chief economist and global head of economics and asset allocati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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