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피에타, 잔혹의 끝에서 자비를 발견하다

이 글에는 201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피에타의 결말을 포함한 주요한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용서와 구원에 관한 영화가 또 나왔다. 참 반갑다.

내가 이 주제를 재발견한 것은, 2009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사건을 잇따라 접했을 때였다.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며 혼란스러웠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대한문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 국화꽃 한송이 바치려고 섰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참다보니 온몸을 흔들면서 흐느꼈다. 그런데 그 울음과 흐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두 전직 대통령의 장례 기간 각각 진보적 기독교계의 추모 예배가 열렸다.

예배에 참석한 나는 위로를 받기 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그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저명한 목사님이셨는데, 그분들이 하나 같이 하시는 얘기가 "이명박 정권의 살인이다. 잊지 말고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느낀 울분과 설움을 대신 터트려 준 것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들의 분노와 복수심을 더 키워줘야만 했을까.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가 어떻게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찾아보니 너무나 많은 앞선 사례들이 있었다.

흑인과 백인이 과거를 극복하고 손 잡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나 독일과 유태인의 화해, 남미 독재정권의 극복, 한반도의 6.25전쟁 당시 손양원 목사님과 일제암흑기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애써온 많은 분들....

그리고 자신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했던 사내.

게다가, 내가 틈이 날 때마다 외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띵!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용서,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면서 너무나 신적인 것이었다.

불가능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거부하고 싶으면서 받아들여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한 분파인 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와 '회복적 정의'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피해 영국으로 미국으로 남미로 옮겨다니면서도 히틀러와 나치를 용서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기독교 공동체다.

눈을 다시 출발점으로 돌려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니, 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정의와 불의, 죄인과 심판자가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였던 대한민국이 사실은 용서받지 못한자와 용서하지 못한 자들이 얽혀 괴로와하는 불구덩이처럼 느껴졌다.

박근혜가 그렇고, 문재인이 그렇다. 강준만 교수가 안철수를 지지하면서 "증오의 시대를 끝낼 적임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찰 권력과 노동자들, 개발자와 원주민들, 갑과 을... 사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

대한민국 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가 부딪치고 있는 모순도 사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용서를 주고 받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는 시각을 갖게 됐다. 식민지를 수탈해 부를 쌓고는 사다리를 걷어차버린 선진국들. 후진국은 다시 그 안에서 독재자와 저항자로 나뉜다. 아니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젠 채권자와 채무자로 세계가 재편돼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는다. 여기선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영화 피에타를 이야기하기 위해 서론이 너무나 길었다.

주인공 강도의 직업은 채권추심업자다. 채권자의 편에서 채무자를 괴롭히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이면서 그 자체가 이 세계를 상징하는 거대한 우화다.

난 이전까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들이 몹시 불편했다. 저런 이야길하기 위해 꼭 이런 장면까지 넣어야 했나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에 피에타를 볼 때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받았다고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서 그런지, 강도가 채무자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이, 매스미디어에서 사라져 우리 눈 앞에 숨겨져 버린 이 세상의 폭력을 직시하도록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생각해보라. 용산참사 사건이 YTN을 통해 생중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충격을 깊이 기억할 수 있었을까. 쌍용차 노동자들이 지붕위에서 질질 끌려 내려오는 장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쌍용차의 비극을 피부로 느낄 수 없다. 용산참사 사건은 이명박 정권 초기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 뒤로 YTN이 그런 장면을 생중계한 적이 있었는가? 생중계용 차량은 용산을 떠나 청와대 앞마당이나 여의도 국회에 자리 잡았다.

김기덕 감독은 그 카메라를 다시 철거를 앞둔 청계천의 퇴락한 뒷골목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엄마의 등장, 강도의 변화, 엄마의 실종과 이상한 사건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엄마는 가장 잔혹한 복수의 방법으로 강도에게 엄마를 돌려주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 복수는  결국 강도가 피해자들 앞에 엎드려 빌며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고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엄마가 내뱉은 이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강도도 알고 보니 불쌍한 놈이었다"

복수심에 불타 모든 것을 던진 엄마의 마지막 고백은 결국 강도와 엄마를 구원했다.

연민. 모두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깨달음.

영화 제목 피에타도 바로 그런 의미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사실 영성 수련에서 가르치는 핵심도 그것이다.

마음이 너무나 답답해서 기도도 할 수 없을 때,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도 모를 때, 영성의 대가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도의 피는 어느 피해자의 트럭을 따라 세상에 뿌려진다. 그는 결국 자신의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었고, 거기서 구원을 얻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 영화의 마지막과 같은 일이 현실에선 불가능할까.

박근혜가 유신의 피해자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울까.

내가 보기에 오히려 그렇게 하면 부동층의 지지를 확실히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끝내 그 방법을 박근혜는 외면하고 있다.

나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데에는 그의 부친 박정희, 모친 육영수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아주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선거의 여왕으로 만들어준 것도 바로 그 연민의 마음이다.

그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의 그림자를 모르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모르는(척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건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역사의 가해자가 되는 길에 서는 행위이다.) 알지만 그래도 불쌍한 걸 어떡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다시 말해 이미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그림자를 용서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엄마를 만나기 전의 강도처럼, 박근혜는 그런 연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민주당의 사람들을 보면 실망스럽다. 그들은 스스로 역사의 피해자이자 정의의 사도가 되어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 마치 최고의 복수를 원하는 엄마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들 역시 모두를 구원하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통합진보당?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들의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정의감에 도취된 홍위병들이 그들과 얼마나 달랐을까.

진보신당은 그런점에서, 좀더 자신들의 중심을 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가길 당부하고 싶다. (이거 영화 감상기 맞나?)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똑같이 편을 가르고 나뉘어 서로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어 으르렁 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길게 설명했으니 중복하지 않겠다.


내게 아이러니한 것은, 김기덕 감독이 문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과 그가 한국의 주류 영화계에 강한 거부감을 거칠게 표출한다는 점이다.

피에타를 포함해 김기덕 감독의 영화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구원의 여신과도 같은 피해자가 등장한다. 피해자가 피해자로 남지 않고 가해자와 세상의 폭력을 모두 끌어 안는 구원자가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피해자이자 약자라고 항변하면서도 포용하기보다는 거칠게 비난하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를 취한다. 영화 속에 묘사된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 충분히 이해가 되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지지 사실을 알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좀 더 세련된 표현을 사용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거칠고 직설적인 문제 제기, 세상을 폭력으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는 시각과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 황금사자상도 탔으니 그의 영화가 폭력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거부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그의 작품을 좀 더 포용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피에타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을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접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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