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총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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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사무실을 찾은 이명박 당선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대표회장이라는 분이 1년에 10억원씩 내야 운영이 되는 단체다. 신학적 기반도 취약하다. 교회 현장에서 애쓰는 대부분의 목회자와 별 상관이 없고, 평신도들과는 더더욱 거리가 있다. 조그만 사무실에 몇 명이 모여 쿵작쿵작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 그런 단체다.


그런데도 왜 한기총이 오늘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일까. 사실은 한기총이 문제가 아니라, 한기총으로 대변되는 한국교회 대중의 정서와 경향이 문제다.


그래서, 한기총은 강하다. 한기총의 반공주의와 권력추구는 사실 한국사회 대중의 정서에 부합한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형교회를 통해 돈과 사람을 동원하거나 정치권에 로비를 하는데도 적극적이다. 한기총을 “보수 개신교 명망가 혹은 개신교 보수 인사들의 모임”으로 규정했던 백종국 경상대 교수도 지난 토론에서 “한기총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라는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그 위상은 변화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어떤가. 허약한 점을 꼽아보면 한기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교회 현장과도 거리가 있다. 반면 강점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신학적인 면과 역사적 경륜은 강점이지만 현실에선 별 힘을 못 쓰고 있다.


한기총의 목소리가 한국교회의 목소리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한기총만의 책임은 아니다. 교회협이 약해졌고, 한기총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지형 위에서 한기총은 스스로 과도한 대표성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한기총이 없어진다면? 그럼 무언가가 해결될까. 아니다. 한국교회의 토양이 변하지 않는 한, 제2 제3의 한기총이 끊임 없이 나타나 자신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보수화되고 파편화된 한국교회의 모습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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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기총의 탄생


한기총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모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살펴보자.


한기총은 애초 교회협(으로 대변되는 한국교회 진보세력)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1989년 12월에 한기총이 탄생했는데, 앞서 88년 2월 교회협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발표가 있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이어진 통일과 민족화해 운동의 한 이정표였다.


다들 아는 내용이겠지만, 약간만 상기하자면 분단과 증오, 특히 ‘한국교회의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처럼 우상화’한 점을 고백하고 사상 이념 제도를 초월한 화해와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예장 통합 총회는 교회협의 통일선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한경직 목사가 89년 1월 남한산성에 한국교회 원로들을 불러 모았다.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모임의 결론이었고, 이후 준비모임과 발기준비위, 준비위 총회(영락교회)를 거쳐 그해 12월28일 창립된 것이 한기총이었다.


한기총 홈페이지에 있는 연혁을 보면, 정식으로 창립하기도 전부터 폭력배격 성명서를 발표하고 6.25상기 연합기도회를 여는 등 반공주의와 친정부 성격을 분명히 했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89년 1월2일 남한산성 모임에 참여한 10명 중 9명이 북한 출신이라는 점 등을 꼽으며 한기총이 월남민 반공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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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기총의 변화


이런 한기총의 성격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역대 대표회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기총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다.


직책

이름

출신지

교단

창립준비위원장

한경직

평안도

예장통합

1대 대표회장

박맹술

경북

예장통합

2대

정진경

평안도

기성

3대

이성택

평양

예장합동

4대

임옥

평안도

예장통합

5대

최훈

평양

예장합동

6대

지덕

경북

기침

7대

이만신

전남

기성

8대

김기수

경북

예장통합

9,10대

길자연

평안도

예장합동

11대

최성규

충남

기하성

12대

박종순

전남

예장통합

13대

이용규

전북

기성

14,15대

엄신형

전남

예장개혁총연

16대

이광선

경북

예장통합

  (이 표에서 빠진 분이 한분 있다. 9대쯤에 들어가 있어야할 장모 목사, 바로 AIR장으로 유명한 분이다. 한기총 홈페이지의 역대 대표회장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은 빠져있다.)

 

초창기 한기총에는 이북 출신 목회자들이 많았으나,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대형교회 목회자가 전면에 나선다. 그리고 최성규 박종순 등 교회협 회장 출신의 한기총 대표회장도 등장한다. 한기총의 필요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욕구가 상응한 결과라고 본다. 국민의정부가 등장한 이후 한기총은 이북 출신 목회자 중심의 반공단체라는 기존의 성격에 변화를 가했다. 그전에는 반공단체의 성격만으로도 충분히 (정권 등에게서) 존재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존재가치를 만들어야 했다. 호남출신 목회자, 영남출신 목회자 등을 내세웠지만 신통치 않았다. 호남 출신으로 처음으로 이만신 목사가 한기총 대표회장이 된 때는 최초의 호남정권인 국민의정부가 등장한 때였고, 뒤이어 영남세력을 대표하는 이기수 목사가 대표회장에 취임했지만 한기총의 기반을 강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형교회 목회자가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 등장하면서 한기총은 비로소 대안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대형교회 목회자가 제공하는 물질적 기반 -돈과 인원 동원- 은 한기총의 존재 가치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반대로 그전까지 교단 총회장 정도가 최대의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했던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는 한기총 대표회장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마련됐다.


엄신형 목사가 10억원의 후원금을 내겠다고 약속한 뒤 중소교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기총 대표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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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기총의 확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기총의 외형은 크게 바뀌었다. 89년 한기총 출범 당시 참여 교단은 36개였다. 지금은 무려 66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 단체도 출범 때에는 기독실업인회, 직장선교연합회 등 6개 단체였던 것이 지금은 월드비전 CCC CTS 등 19개 단체에 이른다.


한기총의 외형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한국교회의 분열로 생긴 무수한 군소교단들이 큰 힘이 됐다. 군소교단은 이단이나 사이비 등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한기총 가입을 하나의 정통성 인정 절차로 여겼다. 교단이 분열하는 경우 누가 먼저 한기총에 가입하느냐를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일 정도다. 한기총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라는 명분에 맞는 외형을 갖추기 위해 이를 환영했다. 역사와 신학적인 명분에서 누가 봐도 교회협에 뒤쳐진 한기총은 양적인 측면에서 교회협을 압도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려 했다.


결국 오늘날 한기총에 가입한 각 교단의 교인 수를 합치면 1000만명이 넘게 되었다. 그 자체가 한국교회 분열에 따른 허수이긴 하지만, 한기총은 성명을 낼 때마다 ‘1000만 기독교인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면서 한층 자신감을 갖는 모습이었다.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 "가진 자 대변하는 한기총은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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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기총의 발돋움


필자가 기억하기에, 한기총이 대사회적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내기 시작한 것은 국민의정부 이후부터였다. 이전까지 한기총의 대사회 활동은 정부가 요청(요구)하는 수준에서 목소리를 내거나 북한교회 재건운동-국민의정부 이전까지는 단순한 구상과 계획에 머물러 있었다-을 내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한기총은 국민의 정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제기된 다양한 문제 -탈북자 동성애 대중문화 생명윤리 해외선교 등- 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활발하게 냈다. 종교 문제가 아닌 이런 사회이슈를 주제로 한 TV토론에 한기총 총무가 출연하기도 했다.


왜 이 시기에 한기총이 대사회 발언을 활발하게 하기 시작했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개인적인 인상비평 수준에서 말해보자면, 우선 당시 대표회장이었던 이만신 목사보다는 박영률 총무의 역할이 컸다. 과거 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을 정도로 정치 지향적이었고 이만신 목사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가 다원적인 사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입장의 목소리를 낼만한 곳이 당시만해도 한기총 정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뉴라이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참여정부 후반기였고, 경실련 정도만 되어도 ‘우경화되고 있다’고 비판 받던 시기였다. 또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그때까지 성역으로 여겨졌던 종교 영역에 대한 사회의 비판도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한기총은 교회에 대한 비판 -목회세습, 대형화, 안티기독교 등- 에 맞서 교회의 이익을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하면서 한국교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과시했다.


반면 이 기간에 교회협은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당시 기독교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모이면 “교회협은 도대체 뭐하냐”는 한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교회협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진보진영은 방향을 잡지 못하던 시기였다. 운동을 이끌어오던 이들은 국민의정부에 직접 참여했고, 물질적 기반이 되었던 유럽교회의 원조는 중단된 상태였다. 당시 일각에서 교회개혁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민중교회 운동이 주춤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교회협 회장을 지낸 뒤 한기총 대표회장에 취임한 한 인사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교회협의 사회적 역할은 사실상 끝났다.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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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00년대의 한기총


한기총이 정교분리의 굴레를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였다고 본다. 그전까지는 사실 정교분리의 테두리 내에서 비정치적인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정도였다.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해봐야 북한핵문제와 탈북자 문제 등에서 보수세력의 입장을 원칙적으로 대변하는 정도였다.


한기총의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한국사회 보수진영은 위기감을 느꼈다. 냉전이 해체되는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는데 보수세력은 노령화되고 실천력도 없었고 저마다의 이익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때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이 한국교회를 ‘보수세력의 보루’로 호출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에서, 한국의 반공 태세가 난파당했다면서 이런 대안을 언급했다.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30%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그것입니다.”


그는 2001년7월부터 기독교 궐기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했다. 7월 한달동안 그가 쓴 글 중 기독교와 관련된 글의 제목만 살펴보면 이렇다.

 

기독교의 궐기-카인의 후예, 사탄의 제자 타도

사탄의 편인가 하나님의 편인가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했던 김일성-김정일

거짓 선지자들을 타도해야 통일이 앞당겨진다.

기독교 뿌리에서 나온 이승만과 김일성의 차이

성경의 사탄, 세상의 사탄

 

제목만 봐도 그가 당시 정치 상황을 보수 기독교인의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하고 교회의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교회개혁실천연대 구교형 사무국장이 “(조갑제씨가)의도적으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도 아니고 기도회도 아닌 반공집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007년 대선의 해에는 한기총이 “대선 후보를 검증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당시 상황은, 한기총이 대선후보에 대해 특별한 기준이나 요구사항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기세 등등했던 한기총에게 시련이 다가온 것은 어쩌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라고 할수도 있다. 이른바 ‘고소영 라인’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기독교적인 배경이 국민의 감시 대상이 되면서 기독교 정치세력은 본격적인 견제를 받고 있다. 한기총은 마치 과거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인 목소리를 아끼는 모습이다.


 

6. 한기총의 성장 요인


지금까지 살펴본 한기총의 발자취를 통해 처음 교회협에 대항하는 임의단체 성격이었던 한기총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대표를 자임하는 단체로 성장해왔는지 그 요인을 분석해볼 수 있겠다.


첫째는 반공주의다. 한기총의 출발이 탈냉전-남북화해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고, 2000년대 들어와 한기총이 주최한 대형집회의 가장 큰 명분도 북한의 핵개발 반대였다.


둘째는 교회의 대형화, 권력화, 세속화 - 한마디로 말해 교회 안의 물질주의다.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개교회 바깥에서 인정 받고 싶어했고, 한기총은 거기에 걸맞는 자리를 제공했다. 민주화와 정권교체 이후 한기총은 정부의 일방적인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형교회는 한기총에 필요한 물질적 -돈과 인원 동원- 기반을 제공했고 한기총은 대표회장 등의 지위로 보답하면서 상부상조했다. 대형교회가 제공한 물질적 기반이 한기총의 외형 확대를 뒷받침했다.


셋째는 교회의 분열이다. 분열된 교회는 역으로 자신들에게 정통성 내지 정당성을 부여해줄 상위기구를 필요로 했다. 한기총은 그러한 역할을 자임하면서 외적 확대에 성공했다.


넷째는 교회의 이익 대변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교회에 대한 비판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서 교회의 이익을 지키는 역할을 한기총이 충실히 수행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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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 한기총을 넘어서서


한기총 문제를 극복하려면 결국 한기총의 4가지 성장요인을 극복해야 한다. 이를 극복하련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없었는가. 거의 없었다. 굳이 꼽아보자면 2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하나는 한기총과 교회협을 통합하고자 했던 교단장협의회였다. 지난번 토론회에서 백종국 교수가 제안한 ‘한국기독교총회’ 같은 형태를 만들고자 했다. 교단장협은 그 자체가 한기총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운동은 아니었지만, 한기총의 4가지 성장요인 중 세 번째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교단장협의 시도에는 오히려 교회협 측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교회협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요인을 우려했다. 즉 교회협이 한기총에게 사실상 흡수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분열 극복이라는 시도를 포기한 것이다. 이는 한기총을 뒷받침하는 한국교회의 토양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교회개혁실천연대를 중심으로 한 NGO차원의 비판이었다. 이는 네 번째 요인, 즉 시민사회를 거스르는 한국교회의 일방적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포기하도록 계속 종용한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토론회도 그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교단장협의 시도가 실패했듯이, 교회개혁 운동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요인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변방의 목소리’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즉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와 물질주의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극복하기 어렵다. 반공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은 결국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체질을 바꾸자는 이야기다.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하지만 지난 경험은 이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고서는 한기총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결론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은 2010년 4월13일 한기총과 한국교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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