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랑의교회에 돌을 던질 것인가

사랑의교회 하트센터 조감도

사랑의교회 새 예배당 조감도

 사랑의교회가 건물을 짓는다고 말이 많다.
 2600억원인가를 들여서 서초동에 13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는데... 대형교회 건축에 따르는 의례적인 비판인가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어찌보면 사랑의교회와 옥한흠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이 그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던 것이고, 또 기대했던 분들이 대형교회 건축을 실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기대라는 것은, 사랑의교회는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과 똑같이 더 큰 교회를 지으려고하니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과 다르지 않다면, 바로 그 남들에는 우리도 포함되는 것 아닐까.

물타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할까.. 지금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개신교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는 우리, 이 거대한 정신의 공동체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을 해야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점에서 사랑의교회는 오히려 비난을 덜 받아야할지 모른다. 마치 샘물교회가 '공격적 선교'의 주범으로 몰려 비난 받은 것이 조금은 억울했던 것처럼...
사랑의교회에서 몇번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다. 정말 비좁다. 예배를 마치고 수많은 사람이 빠져나가려고 줄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 불이라도 나면 정말 다 죽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오죽 했겠는가.

대형교회가 되는 현상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말도 맞지만 사실 나는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게 참 힘들 것 같다. 어쩌다보니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는 5000명 정도 예배에 출석하는 꽤 큰 교회인데, 개인적으로는 이정도로 큰 것이 편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니 나도 사랑의교회에 돌을 던지지는 못할 것 같다.

가슴 아파하지 않고, 비판도 하지 않고, 그냥 무덤덤하게 지켜보는 내 모습이... 어쩌면 더 큰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책을 쓰신 신광은 목사님이, 2009년 12월22일 저녁 열린 오픈포럼-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모임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미리 받았다. 내용이 참 좋다. 조금 길고 어렵긴 하지만 꼭 여기에 남겨놓고 싶다.

(각주도 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덧붙이겠다. 지금은.. 야근중에 이 글을 쓰는데 머리가 너무 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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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의 천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메가처치와 사랑의교회

 

*신광은 목사「메가처치논박」 저자

 

1. 들어가는 말

 

사랑의교회의 교회당 건축 문제 때문에 포럼이 열렸다. 일개 교회의 건축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포럼이 열리다니, 참 대단하다. 이것은 분명 사랑의교회가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대표성 때문일 것이다. 우선 먼저 나는 사랑의교회가 지난 30여 년간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자리매김해 온 점에 대해서 사랑의교회 모든 형제들과 옥한음 목사님, 그리고 오정현 목사님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랑의교회가 집을 짓는단다. 왜일까? 공간이 부족해서다. 사랑의교회는 여러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대지만 그건 화려한 수사일 뿐이다. 새 시대니, 역사적 사명이니, 땅 끝 선교니, 민족을 섬긴다느니 하는 것들은 미사여구일 뿐이고 설득력도 별로 없다.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려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도 사랑의교회의 형편을 조금 알고 있는데 사랑의교회는 정말 공간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의 건축은 공간이 별로 부족하지도 않는데 턱없이 큰 교회당을 지어놓고 빈자리를 채우라며 교인들을 닦달하는 일부 몰지각한 교회의 경우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사랑의교회는 정말 건물이 필요해서 - 물론 얼마나 크게 짓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 건축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2.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이미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그리고 온 세계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번져가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메가처치 현상은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대단히 독특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전례(前例)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며, 전혀 새로운 현상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 새롭다는 말인가?

먼저 과거 어느 시대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지역교회, 곧 메가처치(Mega-Church)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현대의 메가처치의 특징은 과거와는 다르게 성장의 한계가 없다. 한 마디로 무한히 성장하는 교회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가 일반화되었으며, 모범적인 교회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큰 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교회도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으며, 무한 성장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교회는 메가처치 DNA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약 5%내외의 메가처치와 거의95%에 달하는 잠재적 메가처치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로,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는 메가처치를 만드는 것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구령의 사역이며, 세계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점이다. 메가처치가 성서적, 신학적,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도무지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 옳고 건강하다는 생각이 한국 교회를 사로잡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끝도 없는 성장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고 있다. 잠재적 메가처치는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메가처치는 슈퍼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슈퍼 메가처치는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를 지향한다. 한도 끝도 없이 성장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거의 미친 수준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무시무시한 광풍의 정체다.

사랑의교회측은 공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당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왜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는가? 그만큼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왜 건축을 하려는가? 더 크게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자그마치 45,000명이나 출석하는 슈퍼 메가처치가 되었다. 그런데 공간이 부족해서 더 성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2,100억짜리 교회당을 지어 성장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가 되려고 한다. 이것이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의 본질이다.

 

 

3. 사랑의교회는 변질했는가?

 

교회당 신축을 계획하고 있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옥한음 목사님과 예전의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몇몇 분들은 사랑의교회가 최근 들어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옥한음 목사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사랑의교회에 제자 훈련을 정착시킴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세워 놨는데 후임 목사님이 옥 목사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의교회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옥 목사님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두 목사님의 스타일이나 지향하는 방향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관한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에 비해 오 목사님은 옥 목사님보다는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대해서 더 우호적이고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분의 사역 방향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동의하면서도 나는 옥한음 목사님 역시 메가처치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른 모든 교회들처럼 사랑의교회도 처음부터 메가처치의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었으며,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메가처치가 된 교회일 뿐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옥 목사님께서 의도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은 옥 목사님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옥 목사님이 메가처치 현상을 간과한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사랑의교회가 저토록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적인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 성장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양적 성장이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본성상 겨자씨처럼, 혹은 누룩처럼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것은 복음서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전체 교회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어느 한 개교회의 성장을 지시하지 않았다. 사실 신약교회에서는 ‘개교회’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 모임이든, 지역 모임이든 언제나 ‘교회’라고 불렀다. 지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존재했으며, 그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옥 목사님이 말하는 ‘양적 성장’은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 전체의 궁극적 승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부흥’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통상 부흥이라는 말은 구원 받은 무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 교인의 수적 증가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부흥이라는 말이 다소 에큐메니칼한 표현이라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다소 개교회주의적인 표현이라는 말이다. 즉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가 성장을 위해서 각개전투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양적 성장이라는 말 자체는 개교회주의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으며, 개교회의 성장을 항한 생존 경쟁을 긍정한다. 때문에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의 상대적 개념이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개교회주의와 저급한 성장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일 뿐이다. 불행히도 옥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긍정하고 수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 목사님은 제자 훈련을 개별 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소개하기까지 한다. 교회 성장에 대한 옥 목사님의 관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질이 양을 결정하는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제자훈련이다. 즉 제자훈련이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게 바꾸어 놓고, 체질이 바뀌면 교회는 자연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바로 옥 목사님의 교회성장 전략이다. 그는 말한다. “제자 훈련을 해보라. 교회 체질이 ……. 바뀌는 것을 2, 3년 안에 목격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개교회는 옥 목사님의 이러한 권유를 받고 제자 훈련을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이해하며 받아 들였다. 분명한 것은 성장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토록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제자 훈련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옥 목사님의 사랑의교회 출석교인이 500명을 넘지 않았다면 제자 훈련은 결코 오늘날과 같이 크게 보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유포시킨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는 핵심논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건강하지 못한 개교회의 성장이 문제이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 논리는 다시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문제지 건강한 메가처치는 도리어 본받아야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의 궁극적 승리의 약속으로부터 벗어나 개교회의 성장을 지향하고, 의욕하고, 추구하는 순간 이미 교회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옥 목사님은 깨닫지 못했다.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건강한 성장이라면 그것은 개교회의 성장이 아닐 것이며, 개교회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즉 메가처치를 이룰 수단과 더불어 메가처치 현상을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식품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물론 나는 옥 목사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성서와 복음의 요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랑의교회의 명성과 지위를 가져다주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도 인정한다. 또한 옥 목사님의 신앙 양심과 목회 철학은 사랑의교회가 맹목적 성장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과거의 사랑의교회는 확실히 지금의 사랑의교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문제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옥 목사님은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도리어 메가처치 현상을 부추기고 변호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오 목사님의 부임과 함께 크게 변질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의교회는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자란 메가처치일 뿐이다. 지금의 사랑의교회의 모습은 이미 과거의 사랑의교회의 모습 속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료하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4.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1)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옥 목사님은 비록 존경할 만한 정직과 성실함으로 교회 갱신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다. 옥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의 성장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 성장이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는지에 대해서 옥 목사님은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았다. 성장만 말하고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결국 무한성장을 향한 길을 스스로도 걸어가고 말았다.

옥 목사님이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아마도 그가 교회의 크기를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회의 크기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문제에 속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건강한 성장이지 성장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옥 목사님의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교회가 커도 교회의 크기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교회의 형태는 본질과 동일시할 수 없지만 분리될 수도 없다’고 한 한스 큉(Hans Küng)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크기는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한계를 갖는다. 성장의 한계가 없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eider)의 ‘쥐와 코끼리의 유비’에서와 같이 쥐는 쥐의 적정 크기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적정 크기가 있는 법이다. 종(種)마다, 개체마다 적정 크기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적정 크기가 있다는 점은 똑같다. 만일 교회가 생명체라면 다소 큰 교회, 다소 작은 교회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무한히 성장하는 메가처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유기체(organic system)는 개체의 정상적 활동이 가능한 수준까지만 성장하고 그 이상은 성장하지 않는다. 만일 적정 크기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유기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지 못한 유기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생명체요, 유기체로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원리를 인정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의 정상적 기능을 위한 적정 크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한성장은 유기체(organic system)가 아니라 기계적 시스템(mechanical system)의 특성이다.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에도 시스템의 안정화와 최적화라는 기준에 맞추어 크기와 시스템 내부의 속성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 내부의 속성이 크기의 확장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적 시스템은 크기의 확장을 위해서 내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는 내적 본성을 지속적인 변형시킴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메가처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메가처치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지속적으로 변질시키고, 희생시켜 감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2) 크기의 영성

 

교회의 크기는 결코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메가처치에서의 교회의 크기는 한 개인의 의지나 도덕성, 영성을 벗어나 버린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조와 질서,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거기에 구조와 조직, 질서가 새롭게 추가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커질 때 그러한 구조와 질서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지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획득한 구조와 조직, 질서는 자체의 논리를 가지며,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무생물이고, 인격이 아니라고 만만히 보면 큰 코 다친다.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조, 조직, 질서 등을 임의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월터 윙크(Walter Wink)의 통찰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윙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의 천사들’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천사란 날개달린 수호천사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의 교회의 실제적인 영성(spirituality)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교회의 물리적 외형 안에 존재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또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교회의 내면성(interiority)”이라고 했다. 따라서 교회 건물의 크기나 가격, 회중의 수, 예배 스타일, 권력 구조 등이 교회의 천사, 곧 교회의 영성을 결정하는 요인들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그는 사회 조직이나 구조, 질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조직이나 국가에서 규모가 크다는 것은 권세와 가치의 증거다”라는 논리는 사탄의 지배체제의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큰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정확히 메가처치를 옹호하는 논리가 아닌가. 만일 윙크의 말이 옳다면 메가처치의 천사는 교회의 천사가 사탄적으로 타락한 교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바 던(Marva Dawn)도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그녀 역시 사회 조직과 구조, 질서 등이 발휘하는 강력한 힘을 ‘정사(principality)’와 ‘권세(power)’라는 성서적 용어로 설명하고자 했다. 정사와 권세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회적이고 실제적인 ‘힘’이다. 여기에는 돈, 권력, 인력, 미디어, 테크놀로지, 법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정사와 권세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로막는 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권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는 ‘큼,’ ‘많음,’ ‘강함’이라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 ‘작음,’ ‘적음,’ ‘약함’의 권세다. 불행히도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세보다는 세상의 권세를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러한 던의 주장은 메가처치 현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돈, 권력, 인력이 집중된 메가처치는 그 자체로 타락한 권세이다. 뿐만 아니라 생존 문제 앞에 굴복한 수많은 잠재적 메가처치 역시 세상 권세의 속박 아래 있는 교회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기와 양이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인간이 거대하고 웅장한 것과 마주했을 때 본성적으로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고대 종교는 피라밋, 스핑크스, 대신전, 동상 등을 세워서 신성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와 비슷하게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도 폴리네시아인들이 평균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를 가리켜 마나(mana) 나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했다. 이때 마나는 신성한 기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도 갑자기 크게 수가 불어난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교회’라고 불러준다. 불어난 거대한 교회당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회중의 웅장한 회집 장면을 보고 성령의 터치를 경험한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크기와 숫자를 영성(spirituality)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때의 영성은 이교적 영성이다. 크기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과 반대되는 이교적 영성이다.

옥 목사님은 크기의 영성을 분별했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의 크기가 자신의 신학과 목회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깨어난 평신도’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미친 평신도 운동과 이를 가능케 한 평신도 신학에 기초해 있다. 평신도 신학의 요지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의 폐기에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교회 내 2층 구조를 파기하고 만인제사장주의라는 종교개혁적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불가피하게 교회 안에 대중이라는 평균인으로 들끓게 한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에게로의 권력의 집중, 피라밋 구조로 서열화, 성직자 집단을 대체하는 전문가 엘리트 집단, 관료제,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등이 요구된다. 결국 메가처치는 군중을 이루는 평신도와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이원화되고, 담임목사는 제왕의 자리로 추켜세우고야 만다. 따라서 메가처치 내에서 평신도 운동은 말뿐인 선전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5. 문제의 뿌리는 빈약한 교회론에 있다.

 

옥 목사님이 교회의 크기 문제에 주목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나 이 책임을 옥 목사님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문제의 뿌리는 옥 목사님도 잘 지적하셨듯이 개신교회의 빈약한 교회론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빈약한 개신교 교회론을 수정하고자 참신한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충분히 넘어서지 못한 것이 부족한 부분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 개인주의를 넘어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택자들의 총회”이다. 이러한 정의의 큰 약점은 교회를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의 정의다. 보이는 교회는 ‘택자와 비택자의 혼재된 집단’이라고 해야 맞다. 이러한 교회관은 우리의 시선을 교회 자체보다는 교회 안의 개인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에릭 제이(Eric C. Jay)의 말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나 성령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의 총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의 것이다. 개신교 교회론에 따르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서 교회가 만들어 진다. 교회보다 개인이 먼저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침례/세례를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개인이 있기 전에 교회가 먼저 존재한다. 교회는 실체성이 있는 사회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ekklisia)는 상당한 정치성을 함축한 회중을 의미한다. 그래서 큉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집회가 아니라 정치적 집회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현저히 뚜렷한 정치성을 지니는 사회다. 로핑크(Rohfink)는 이러한 교회의 사회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는 그 자체가 ‘사회’라야 하고, ‘대립 세계’라야 하며, 하나의 정책이라야 하고, 문화를 가져야 하며, 그 신앙으로부터 사회적이며 미학적인 형식들을 위한 새로운 척도들을 세상 안에 내어 놓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안의 개인들이 모여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해나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는 개인보다 선행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이 실체가 자신의 전존재로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해 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구조, 질서, 조직, 그리고 크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헤베르 루(Hebert Roux)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 관계와 접촉이 성립하기 너무 어려운 도시의 큰 소교구 대부분의 구조 자체의 완전한 변화 없이 실천적 실현이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늘날 큰 도시의 격렬하고 끔찍한 삶이 만들어 낸 익명과 고립 그리고 거리감, 사회적 조건의 차별 그리고 또 다른 요인들은 그 안에서 ‘공동의’ 삶이 유토피아인 큰 소교구의 실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교회는 적은 인원의 집단과 모임도 증가시키면서, 모든 위장된 정신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현실 영역에 건립하면서,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 각각의 특별한 상황과 필요를 알게 하는 조직 형태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직은 계시를 따르고 동행해야만 하는 것이지 조직이 계시를 선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합당한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메가처치의 태만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메가처치는 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실천하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인들에게는 제자의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제자의 길을 배반한다.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영광의 길을 추구한다. 마치 그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이다.

 

2) 성육신적 방법론

 

그런데도 메가처치는 도리어 스스로를 변호하며 이르기를, “메가처치는 선교와 구제에 특심이다. 교회가 클수록 선교 사업이나 구제사업에 더 왕성한 참여를 할 수 있다. 메가처치는 작은 교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큰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한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가처치의 주장의 이면에는 선교와 구제를 교회 내의 개인이나 부서의 활동으로 보거나, 혹은 교회의 여러 기능이나 활동 중 하나로 보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오해다. 선교와 구제는 교회 내 개인이나 부서가 하는 사역이기에 앞서 교회 그 자체가 하는 것이다. 또한 선교와 구제는 교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라는 사건 자체가 바로 선교와 구제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또한 교회는 장차(not yet)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예표다. 스탠리 하워와스(Stanley Hauerwas)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다. 따라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종말론적 실체를 자신의 존재(being)로 예시하는 공동체다. 이 책임은 교회 내 개별 신자에게 있기도 하지만 우선 교회 자체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는 자체의 구조와 조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반영해야 한다. 즉 교회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선교와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성육신적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계시라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전달자(messenger)임과 동시에 그분 자신이 계시(message)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 자체가 바로 온전한 계시가 주어진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Medium is Message)’라는 유명한 테제에 가장 정확히 일치하는 사건이다. 즉 예수의 성육신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media)일 뿐만 아니라 계시 자체(message)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성육신의 모델이 교회와 신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바로 이러한 성육신적 원리를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보다 앞서서 자신의 존재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신자나 교회 내 부서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라 교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원리다. 때문에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선교와 구제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 선교를 다시 생각하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신의 존재로 선교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존재로써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 바로 복음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존재로써 자신을 비워 그리스도 사건을 온전히 증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는 낮은 자로 오심,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심,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 부활하심 등의 그리스도 사건을 자신의 존재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강단에서의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현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성장 경쟁에서 승리한 텐프로(10%)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찬미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부를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가난한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는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권력의 희생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는가? 주변의 중소 교회를 먹어치우고 성장을 거둔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십자가의 희생의 죽음을 나타내겠는가? 모든 교회가 개교회로 뿔뿔이 흩어져 성장을 위한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메가처치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는가? 2,100억짜리 교회당을 소유한 교회가 무슨 수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제자도를 전하겠는가? 소가 웃을 일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선교는 교회가 하는 어떤 활동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수 천, 수 만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세상을 섬기는 것이 바로 선교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를 교인들에게 내맡겨 버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구조와 신학을 통해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말한다. 만일 교회의 구조가 이러한 세상을 섬기는 일을 방해한다면 그 구조는 “이단”이나 마찬가지라고.

 

4) 구제를 다시 생각하다.

 

구제도 마찬가지다. 많은 메가처치는 막대한 돈을 구제사업에 쓰고 있다며 자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많은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성장해야 한단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소리다. 물론 그러한 구제라도 그것은 분명 값진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채 그러한 구제를 한다면 그것은 구제의 세속화를 초래하며, 구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회사업이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헤베르 루가 말한 대로 구제는 교회의 한 가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것이라야 한다. 즉 교회가,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굴복될, 장차 올 세상의 예표라면 교회는 돈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구제사업보다 선행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먼저 교회 안에서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소유권 주장은 근본적으로 반역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은 “돈의 절대 권력이 멈추고 맘몬의 힘이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돈의 권세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데 어떠한 필연성도 없음을 교회는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도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스스로 맘몬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자백일 뿐이다. 돈의 권세가 결박을 당할 때 교회에서 재물로 형제를 돕는 코이노니아는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재산의 나눔은 교회가 하는 자선이나 구제‘사업’이 아니다. 교회가 다가올 새 창조의 예시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회의 생명과 본질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것이 참된 구제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곧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메가처치는 교회 내의 신자들에게 복음을 살라고 설교할 수 있을지 언정 결단코 자기 자신은 복음을 살아 낼 수 없다. 메가처치가 딛고 서 있는 기초는 교회의 크기와 본질이 무관하며, 교회의 활동(doing)과 존재(being)가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정신주의와 관념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메시지를 잘라 내려고 했던 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크기는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행함(doing)이 존재됨(being)을 대체할 수 없다. 교회는 먼저 자신의 존재, 곧 구조와 조직, 신학을 통해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요더(Joder)의 말대로 ‘효과’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복음을 살아 내고자 노력한다면 결코 메가처치는 가능할 수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6. 해법을 모색하며

 

1) 문제를 대하는 자세

 

자, 그렇다면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우리는 이 문제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점에서 그런가? 일차적으로, 이 문제는 어느 한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문제다. 그래서 사랑의교회가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간에 그 결정은 한국 교회 전체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의미 있는 결정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 교회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신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의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개교회주의적 태도나, 한 가지 해법만이 존재한다는 기술주의적 태도나,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독단적 태도는 옳지 못한 자세다.

둘째로, 이 문제는 결코 사랑의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사랑의교회의 건축이 결국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임을 증명하는 슬픈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만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혔는가? 사랑의교회만 교회당을 짓겠다고 하는가? 작은 교회는 건축 마케팅을 하지 않는 줄 아는가? 사랑의교회를 비난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의로운가? 물론 사랑의교회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진 교회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책임을 사랑의교회에만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 교회 모두는 이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공범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간홌자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기소하는 무리들처럼의 민재판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또 이 문제를 건축을 찬성하는 입장럼의 대하는 입장 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의 갈등 문제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며, 사랑의교회와 근 중소형 교회 간의 나와바리 다툼으로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한국 교회 모두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범죄자임을 고백하는 자세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 문제는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하든지 모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을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다.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평가하고, 손쉽게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의교회 측은 건축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밀어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재고를 요청하는 측에서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건축만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감히 제안하는 바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를 시간을 두고 한국 교회 전체가 연합하여 지혜를 모아 해결해 나가면 어떻겠는가?

넷째로, 우리는 이번 사건이 한국 교회의, 나아가 개신교회 전체의 보다 근본적 오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옥 목사님께서 정확히 간파하셨듯이 교회론의 빈약함이라고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이러한 개신교회의 근본적 오류에 대한 대안으로 제자훈련을 제시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그 대안은 충분치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의 성패를 정확히 평가하고, 보다 충분하고 철저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와 선조들이 저질러 왔던 근본적인 오류를 풀어내는 회개와 돌이킴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두 가지 선택 가능성

 

Alt. 1 : 건축을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랑의교회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건축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랑의교회 입장에서는 건축을 하는 쪽이 하지 않는 쪽보다 훨씬 쉽고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한다면 결국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 현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교회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된다. 결국 사랑의교회는 무한성장을 향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교회요, 암세포와 같이 통제되지 않는 성장(uncontrolled growth) 때문에 스스로의 덩치를 주체할 줄 모르는 병든 메가처치임을 자인하게 된다. 나아가 사랑의교회는 이와 유사한 문제에 처한 교회들을 향해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메가처치 전도사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한국에 있는 다른 많은 교회들 중에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또 하나의 교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면에서 사랑의교회는 주목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축한 교회당이 건축상을 받는다거나, 거대한 규모의 선교 및 구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거나, 멋들어지고 근사한 이벤트를 연다거나, 단기간 내에 빠른 성장을 보임으로써 성장 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건강한 교회의 모델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아마도 2009년을 사랑의교회가 자신의 대표성을 상실한 해로 기록할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건축을 두고 열린 이번 포럼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역사의 준엄한 요구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고작 2,100억 원으로 자신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다.

 

Alt. 2: 건축을 하지 않는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의교회는 분명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건축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오면서 가졌던 방향성이 흔들리게 될 것이고 이와 함께 목회자와 교인들이 혼란을 겪을 것은 뻔 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공간 부족의 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다시 떠안게 될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매 주 마다 몰려오는 거대한 규모의 교인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교회당 건축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사랑의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 성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장을 위해 매진하지 않는다면 메가처치인 사랑의교회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의 건축 포기 결정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시 사랑의교회는 달라도 뭐가 달라’라는 칭송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한국 교회를 향해서 커다란 경종을 울릴 것이다. 물론 사랑의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상징성과 대표성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건축을 포기하는 결정은 불러일으킬 편으로서는 상당한 희생일 수밖에 없으며 대단한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 아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립 개척이나 교인들을 분산시키는 것, 또 건물 임대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사랑의교회를 향한 애정의 표현이요, 참된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의미 있고 나름대로 현실적인 제안이다. 나 역시도 사랑의교회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러한 용기 있는 결정을 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교인들을 돌려보내거나 분산시키기, 혹은 분립 개척 등은 인위적으로 사랑의교회의 교인수를 줄여서 공간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나는 작은 교회 역시 잠재적 메가처치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에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또 건물 임대라는 제안 역시 답이 되지 못한다. 사랑의교회는 이미 충분히 많이 건물을 임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윤리적 성격의 해법은 결국 “왜 우리만 그래야 되는데?” 그리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 문제는 윤리적 문제가 아닌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7. 제 3의 길 : 교회 일치 선언을 제안하다.

 

1) 메가처치 현상은 개교회주의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한민국 모든 교회가 너나 할 것 없이 무한 성장을 향해 미친 듯이 줄달음질을 하고 있는 마당에 사랑의교회도 끼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회 밖의 사회적 요인이고, 또 하나는 교회 내의 신학적 요인이다. 물론 둘 중에서 신학적 요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 가톨릭교회를 보라. 개신교회와 똑같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을 비껴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 가톨릭 신학, 특별히 견고한 교회론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메가처치 현상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개교회주의다. 교회의 일치 문제를 보이지 않는 교회에게로 투사해 버리고, 교회 간 연합은 거추장스러운 정치적 야합인양 여기는 풍조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휩쓸었다. 결국 남은 것은 모든 교회는 개교회로 존재한다는 개교회주의다. 개교회주의는 세속의 풍조를 막아내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급격한 사회적 변동에 맞서 교회는 아무런 면역력도 갖추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세속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교회 안으로 밀어닥쳤다. 특별히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가 교회를 범람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네온 십자가는 개교회주의가 만들어 놓은 한국 교회의 슬픈 초상이다. 1층 편의점, 2층 장로교회, 3층 감리교회, 그리고 지하는 침례교회. 주일 아침이면 교인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오기 위해서 교회마다 봉고차를 운행하고 이웃 교회 교인들에게까지 소위 전도한답시고 영업의 손길을 뻗는 현실……. 대체 이게 뭔가? 넘치는 목사 후보생들이 아무렇게나 교회를 개척해 놓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스스로 면역력을 잃어버린 채 교회 밖에서부터 가해지는 세속의 조류에 힘없이 휩쓸리고 만 결과가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 아닌가 말이다.

얼마 전 미국의 메가처치에서 꽤 오랫동안 원로목사측과 갈등하던 신임목사가 끝내 사임을 하고 근처에다 교회를 개척한 일이 있었다. 새로 개척한 교회는 그 전 교회로부터 차로 고작 6분 거리에 떨어져 있단다. 그런데 한국의 내로라하는 메가처치 목사들이 그러한 교회 분열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단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책망은 못할망정 축하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맞는가?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사모했던 그리스도의 몸이 맞느냐는 말이다. 왜 이와 같은 패역한 상황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가? 왜 주님 앞에서 이와 같은 패역무도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감각 없이 모든 상황들을 수용하고 마느냐는 말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결국 개교회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그리고 개교회주의는 우리와 선조들이 지난 500년간 저질러 온 근본적 오류의 산물이다. 근본적 오류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결국 교회의 일치야 말로 개교회주의를 치유하는 길이요, 메가처치 현상을 잠재울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다. 물론 교회의 일치가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룩해져야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는 거룩을 향한 첫 걸음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2) 교회는 하나다.

 

교회 분열과 그로 말미암은 개교회주의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다. 교회가 증언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그리고 교회는 을 의 말 뿐만 아니라 을 의 그리를 통해서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의 참된 의미다. 따라서 교회가 만일 을 의 그리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현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아무런 실효성도 없어지고 만다.

교회가 일치되지 못할 때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위대한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흔히 지상명령의 근거 구절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 구절은 전도자나 선교사로 나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제자를 삼는 방법은 산상설교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르쳐 온전히 지키게” 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 사랑⃼가르쳐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된다. 결국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 계명⃼가다건 부르다. 요한에 따르면 토라를 대체할 만한 새 계명은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서로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13:34-35] 또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2-3] 따라서 교회 일치에 실패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또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교회는 평화를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에 비유하셨다. 이는 이리의 포악함에 반대되는 양의 온순함을 강조하시는 표현이다. 제자는 다툼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평화는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인 표징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다.[미4:3] 교회는 그러한 샬롬의 나라를 자신의 존재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분리되고 서로 타투고 이기기 위해서 경쟁하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사도는 경고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십자가의 복음은 왜곡된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루신 일의 핵심은 화목과 화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세상 간의 원수 관계를 화해시키셨고, 지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물며 적대적 원수 관계들을 청산하셨다. 그리하여 가장 화해하기 어려웠던 이방인과 유대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건물로 이어지게 되었다.[엡2:14-22]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가 온전히 드러나는 곳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는 곳이다.[엡1:10] 따라서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화목도 이루지 못하며, 어떠한 막힌 담도 허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불일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선포될 수 없다. 사랑, 평화, 화목은 장차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교회가 받은 선교사명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 평화, 화목이 왕노릇하는 공동체라야 한다. 모든 차별과 분리, 장벽이 철폐되는 혁명 공간이라야 한다. 이러한 혁명 공간인 교회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초대교회는 이것을 실제로 실천했다. 그리고 모든 장벽이 완벽하게 허물어진 지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시했다. 그리고 외인들은 교회에서 성취되는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화해와 화목을 충격으로 받아 들였다. 이방인들은 급진적 혁명 공간과 해방 공동체를 목격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분리되고 일치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할 것이며,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아편으로 퇴락할 것이다.

교회가 분열할 경우 교회는 더 이상 참 교회일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합당하게 증언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이 수석 사도 베드로를 호되게 면책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식사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도피한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다시 가르는 분리의 행위였으며, 이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배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갈2:14] 같은 이유로 그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사태에 대해서 그토록 통탄해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십자가에 대한 배신 행위요 반복음적 행위다.[고전 1~2장]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여전히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담대하게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세계교회는 하나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키프피아누스(Cyprianus)가 순결주의자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와 결국 갈라선 이유도 교회의 일치를 포기하는 행위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개교회주의로 뿔뿔히 갈라져 서로 경합하고 다투는 한국 교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한국 교회는 스스로 참 교회가 아님을 자신의 전 존재로 떠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3) 어떻게 일치를 이룰 것인가?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의 근원은 메가처치 현상이요, 메가처치 현상의 근원은 개교회주의요, 개교회주의의 근원은 교회의 불일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은 교회 일치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을 이룰 것인가?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불가능해 보인다. 꿈꾸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교단 및 교회의 분리, 개교회주의, 메가처치 현상 등을 비판 없이 수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의 패역한 상황에 대해서 분노하고, 비난하며, 결연히 저항(protest)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신교(protestant)의 정신이다.

셋째로 나는 이 지면을 빌어 한국 교회가 교회 일치 선언을 할 것을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선언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하지만 선언이 충분히 진지하고, 충분히 엄숙하다면 개교회 성장의 추구가 아닌 전체 교회의 성장의 추구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물꼬가 트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에 사랑의교회와 포럼 주최자들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넷째로 선언에 걸맞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안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단을 초월한 열린 대화, 성장 경쟁의 종식, 상호 부조 등과 같은 구체적 풀뿌리 에큐케니컬 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사랑의교회는 건축에 힘을 쏟는 대신 인근 사방 수 백 미터 내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성장 경쟁을 종식할 것을 선언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연대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통해서 강남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고, 그리스도의 화해가 임할 수 있는 보다 실제적인 일들을 함께 구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합 모임에서 사랑의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일치의 원리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과연 무정부상태나 다름 없는 지금의 한국 교회가 아무런 구심점 없이 교회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개신교회는 바티칸 없이 어떻게 보편교회(Catholic Church)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티칸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정 메가처치가 바티칸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또 바티칸을 대체할 만한 기구를 새로 결성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W.C.C.로 바티칸을 대신하는 것은 어떨까? 새로 연합기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인 듯하다. 한국 교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일찍부터 많은 수고를 해 온 W.C.C.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필요한 교회 일치는 어떠한 식의 정치적 연합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치와 연합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나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나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바울이 제시한 십자가의 연합 전략을 한국 교회가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교회에는 최소한 네 개의 파벌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큰 파벌은 바울파였을 것이다. 바울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유대인 중심의 베드로파였다. 그리고 철학적이고 지적인 성향의 아볼로파와 원리주의적 성향의 그리스도파가 비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 네 파벌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있다고 준엄하게 꾸짖은 뒤 네 개의 파벌이 스스로의 정체성의 근거로 붙들고 있는 자랑거리들을 향해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한다. 베드로파가 자랑하는 표적과 능력,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자랑하는 말과 지식, 그리고 문벌이나 지혜 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격하게 성토한다. 그런 다음 가장 초라하고 부끄럽고 작고 약한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참 능력임을 선포한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동조하는 파벌을 포함하여 네 개의 파벌 모두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의 연합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는 자신의 강함과 자랑거리를 수치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가운데 은총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교회가 자랑하는 제자 훈련조차 한국 교회에 많은 유익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자랑거리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옥한음 목사의 인격과 덕성도 마찬가지고, 소위 사랑의교회라는 브랜드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랑의교회가 짓게 될 2,100억 짜리 교회당은 십자가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괴물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서슬 퍼런 칼과 창에 불과하다. 따라서 크기를 자랑 삼았던 메가처치는 자신의 크기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많은 구제와 선교를 행한 것으로 자랑했던 교회, 순수한 교리를 자랑했던 교회, 설교를 자랑했던 교회,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교회, 특별히 담임목사를 자랑하는 이 시대의 허다한 교회들은 그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치유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마치는 글

 

솔직히 나는 이러한 제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을 치유하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믿기에 감히 이러한 제안을 해본다.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순전히 덩치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 안에 진리도 없고, 복음도 없다. 이는 교회 스스로가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가 복음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는 곳에 성령이 없으며,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에 더 이상 교회는 지속될 수 없다. 다만 종교만이 남아 한 두 세대를 이어갈 뿐이다.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덩치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는 듯 하지만 실상 이는 허수요, 허상이요, 허세일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실감하기 위해서 교회의 덩치를 더 크게 키우는 일은 바닷물로 목을 축이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한국 교회는 한때는 크게 부흥했지만 성령께서 떠나간 뒤 급속하게 쇠락해 버렸던 역사 속의 허다한 교회를 살펴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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