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도시 빈민 연구 - 케이프타운의 사례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51명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 인구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중 3분의1은 과거 우리의 판자집과 같은 빈민촌에 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에서는 도시빈민의 비율이 3분의2로 역전됩니다. 도시에 따라서는 90% 이상이 빈민인 지역도 있습니다.

 이같은 문제는 2006년 UN-HABITAT의 보고서 ‘Challenge of Slum’을 통해 알려졌으며, UN-HABITAT는 2020년까지 도시빈민 1억명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하는  ‘UN 새천년 개발 목표(the Millennium Development Goal)’를 정하고 추진중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 역사적인 선거를 통해 인종차별정책(Apartheid 아프리칸스어로 분리,격리를 의미)을 철폐했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여전히 도시 외곽의 슬럼가에서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남아공에서 슬럼이 형성되고 확산된 역사는 아파르트헤이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13년 백인정부는 토지법을 도입해 흑인을 자신들이 거주지에서 추방했습니다. 쫓겨난 이들은 도시 외곽에 판자와 양철, 심지어 종이상자로 집을 지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의 수도였던 케이프타운에서도 ‘공공질서와 보건’을 이유로 이같은 조치사 시행됐습니다. 쫓겨난 사람들은 해변가 모래밭 위에 판자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슬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습니다. 농촌과 이웃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도시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겐 슬럼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곳을 ‘타운십(Township)’이라고 불렀습니다.

 백인들은 1924년 슬럼법을 제정해 정부가 마음대로 슬럼 지역을 쓸어내고 개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타운십을 도시와 분리하기 위해 철길과 도로를 놓았습니다. 타운십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가운데로 도로를 놓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에 제정된 ‘불법 이주 노동자 체포법’ ‘불법 점유 금지법’ 등이 시행되면서 타운십 철거가 시작됐습니다. 정부는 긴급구호 캠프로 흑인을 내쫓고 판자집을 불도저로 쓸어버리면서 케이프타운 안에서는 더 이상 흑인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반면 판자촌은 점점 더 외곽으로 흩어져 커갔습니다. 크로스로드, 케이프플래츠가 형성됐고 흑인들의 저항이 커지자 해변가의 버려진 땅에 미셀 플레인, 칼리처 같은 슬럼 지역이 ‘공식’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이 중 크로스로드는 공항 가까운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백인 농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곳에 판자집을 짓고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1975년 이 지역의 판자촌을 불법건축물로 규정하고 퇴고령을 내렸습니다. 주민들은 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막았습니다. 당시 이 곳에는 1만8000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크로스로드를 둘러싼 정부와 빈민들의 싸움은 1980년대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와중에 흑인 빈민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1983년 존슨 응호봉와나(Johnson Ngxobongwana)를 대표로 인정하느냐를 두고 유혈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6만명의 주민들이 집을 잃고 인근 칼리쳐로 옮겨갔습니다.

 크로스로드에서 멀지 않은 Modderdam에서는 1977년 2대의 불도저가 들어와 판자집을 왔습니다. 불도저가 1주일만에 판자집들을 철거해버리는 것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8월2일 자유를 요구하는 노래를 불렀고, 노랫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과감해져 경찰을 감금하고 가구를 거리에 내던지며 자기의 집에 스스로 불을 질렀습니다.

 칼리처는 1985년 정부가 타운십을 합법적인 거주지로 개발하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전체는 4개의 타운으로 나눠졌고, 각 타운에는 3만명이 벽돌집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공중 상수도와 화장실도 만들었습니다. 1986년 이곳에는 4150명이 들어왔고, 불과 4년뒤인 1990년 칼리쳐의 인구는 45만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곳의 실업률은 80%에 이르렀으며, 제대로 된 벽돌집에 사는 사람은 14%, 상수도와 화장실을 갖춘 지역은 54%, 그마저도 없는 곳도 32%에 이르렀습니다. 전기가 공급되는 집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가정이 공중상수도에서 물을 길어 생활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타운십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흑인들이 도시 안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부 규제에 저항한 봉기였습니다. 그 결과 1986년에는 통행금지법, 1991년에는 집단구역법이 폐지됐고, 이로 인해 케이프타운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흑인인구가 1982∼92년의 10년 사이에 3배나 증가했습니다. 끔찍했던 통행금지법이 없어지자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케이프플래츠로 몰려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습니다. 하루에도 80∼90 가정이 이곳에 왔습니다. 맨손으로 나무 막대기와 함석판, 쓰레기매립지에서 주워온 잡동사니 등으로 집을 만들었습니다.

 1995년 칼리처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가축을 끌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칼리처의 인구는 2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곳에는 병원이 하나도 없고, 경찰도 없다시피합니다. 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비공식 대표를 선출해 자경단을 구성하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타운십은 하라레와 마카사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슬럼 안에서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프리카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남아공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착할 곳은 슬럼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남아공 경제도 넉넉하지 못해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남아공 흑인과 다른 나라의 흑인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입니다. 지난해에는 슬럼 안에서 ‘외국인 추방’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케이프타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백인들의 부유한 도시는 따로 있습니다. 케이프타운 외곽의 서머셋웨스트SomersetWest는 아파르트헤이트 직후 장벽을 없애긴 했지만 대신 1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전기장벽을 설치했습니다. 흑인들이 사는 타운십의 결핵 감염비율은 서머셋웨스트보다 50배나 높습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2004년 IMF-세계은행 연례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 2130년까지는 초등교육을 의무화할 수 없을 것이고, 2150년까지는 빈곤의 50% 감축을 이룰 수 없고, 2165년까지는 영아사망 예방조치를 취할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이 되면 블랙 아프리카의 슬럼인구는 3억3200만명에 이를 것이며 15년마다 2배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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