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현대사를 평가한다-김흥수 기독교역사연구소장 인터뷰

김흥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김흥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드디어 '한국기독교의 역사' 3권이 출간됐습니다.

 

드디어라는 말을 붙인 것은 2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1,2권이 출간된 뒤 무려 20년만에 나왔다는 것이고, 해방이후 2000년대초까지 한국 교회의 현대사를 역사가의 눈으로 엄정하게 바라본 '한국기독교 현대사'의 정본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김흥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3년전 소장에 취임했다는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김 소장은 그동안 한국교회사가들이 교회와 민족사를 연관시켜 역사를 기술해왔지만 앞으로는 한국 기독인들의 세계 선교 경험도 다뤄지는 등 새로운 연구 대상과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에 대한 자기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강조한 것이 한국 사회 보·혁 갈등의 원인중 하나라면서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좀처럼 상대의 입장을 경청하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관점도 인간의 사고에 불과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1945년 이후의 한국교회사 서술이 지연되는 것도 바로 이런 환경과 관련 있어요.”

 

 (2006년 2월8일 국민일보)

 

20년의 산고 끝에 책을 펴낸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김 소장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이미 지면을 통해 보도했지만, 짧은 지면에 다 적지 못한 내용을 여기 소개합니다.

 

김 소장님은 대전 목원대 교수입니다. 감리교 목사님이시죠. 인터뷰 날짜를 서울에 올라오시는 날로 맞췄습니다. 소장님 편한 곳으로 저희가 가겠다고 했지만, 소장님은 직접 국민일보로 와 주셨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오셨습니다.

 

길도 낯설고 먼데 노학자께서 홀로 와주셔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여의도공원에서 사진을 촬영하면서 김 소장님은 "많이 알려져서 많은 분들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또 감회를 여쭈어보니 "현대사 자료를 수집하는데 굉장히 애를 먹었다"며 오히려 현대사 자료가 더 남아있지 않다고 한탄을 하셨습니다. 일례로 1988년 남북교회가 만난 스위스 글리온회의 사진을 책에 넣으려고 했지만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진촬영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책이 나온지 한달 좀 안 됐는데,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직 내용에 대한 반응은 저희들이 못들었는데, 책을 미리 본 기자들의 반응은 1,2권에 비해서 평이하다. 그리고 45년 이후 한국 격동기 역사를 고심하면서 쓴 흔적이 보인다는 정도의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또 책이 지금 막 팔리고 있는데, 아마 몇달내로 재판을 찍을 것 같다. 이게 원채 45년 이후 역사를 많이 기다려온 것이라, 독자들이 많이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1,2,3권으로 나왔습니다. 1,2권은 학문적이고 다소 딱딱합니다. 책도 두껍고 각주도 많습니다. 글자도 적구요. 반면 3권은 책도 가볍고 글씨도 큽니다. 각주도 일부러 줄였습니다. 1,2권을 의외로 일반인들이 많이 보았기에 3권은 처음부터 일반인들이 부담없이 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아래부터는 반말로 정리하겠습니다.)

 

-1,2권이 많이 팔렸던데 사람들이 그렇게 역사에 관심이 많았나 싶었다.

 몇해전 스위스 베른 대학의 교회사가 연구소를 방문했는데, 당시 10쇄 정도 나갔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 유럽에서는 교회사 책을 사보는 사람이 없다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 지금 6월에 1권은 21쇄, 2권은 15쇄를 또 찍는다. 한국교회가 1990년대 이후로 교회의 정체성을 찾는 그런 열기 같은 것이 생긴 것 같다. 신도들 중심으로. 쉬운 책이 아닌데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과거를 돌아본다는 점에거 대단히 긍정적인 현상으로 본다.

('한국기독교의 역사' 2권은 일제시대를 다뤘습니다. 일본에서도 번역출간됐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 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역사학회

 -현대사는 관련 당사자들이 살아있고 사실에 대한 평가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집필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집필은 우선 저희가 90년 2권 내고 바로 3권을 내려고 했는데, 1945년 역사를 기술하는게 부담스러운 점이 많았다. 역사에 관련된 분들이 생존자들이 많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 관점이 서로 다르고, 거기다가 1945년 이후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분들이 별로 없었다.

 

 1990년대가 되면서 한국교회의 현대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도 부족하고.. 또 자료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북한교회라든지 6.25 전쟁 부분은 자료를 수집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늦어졌다.

 

 가장 저희들이 조심스럽게 다뤘던 부분은 교단 분열 부분이었다. 교단 분열은 각 교단마다 분열 원인을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에 요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서술할까 고심을 많이 했다. 또 6.25때 교회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당시 세계교회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한국 전쟁을 바라봤는지, 그런 점이 민감한 문제여서 심사숙고를 많이 했다. 또 기독교에서 파송된, 신흥종파, 이단으로 규정한 집단을 서술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6.25전쟁 부분과 북한교회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북한교회 바라보는 시점은 반공시점이 과다하게 들어가 있어서 객관적으로 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가야했다. 각 분야 전문가의 관점을 들어보고, 자료를 수집해서 다시 논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새로운 자료가 있어야 새로운 관점이 생기는데,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WCC도서관이 큰 게 있다. 거기서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WCC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자료집을 간행했다. 이런 것을 처음으로 한국교회사 서술에 들어갔다.

 (3권을 출간하는데는 집필자와 검토자 등을 합쳐 30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실로 대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책은 주석과 연표를 빼면 263페이지에 불과합니다만,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증거겠지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이념 혹은 역사관을 강조하기보다 실제 자료 위에 역사를 정리하는 실증적인 관점을 강조하는 학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위해서도 자료를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집만 몇권이나 출간될 정도였습니다. '북한교회사' 'WCC 소장자료집' 등이 그것입니다.)

 

-책에서는 북한 가정교회를 신앙의 맥을 이어온 정통으로 평가했던데, 그렇다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가정교회가 공개적으로 이어져 온 것인가.


 1950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종의 음성적인 조직이었다. 북한 사회 분위기도 그러했다. 그러다가 60년대와 70년대, 북한 정부에 충성하는 일부에게 신앙생활, 가정교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있다. 한쪽으로는 지하 가정교회, 또 그중 일부는 북한정부가 인정했다. 특히 7.4 공동성명 이후 남북교회 분위기가 좋아지면서 일부 북한의 가정교회가 드러난 적이 있다. 지하-지상 두개의 흐름이 80년대까지 오다가 봉수교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평양의 가정교회 교인들 일부가 봉수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북한 조그련 간부들이 얘기하고 있다. 또 실제로 우리가 다양한 경로로 확인했다. 봉수교회에 가면, 해방직후 신학교 졸업생과 목사 장로 아들딸들도 있다. 그런 점을 확인한 사람이 20명이 넘는다. 그런 분들은 가정교회 신앙생활을 하다가 봉수교회에 참여한 것으로 정리했다. 북한교회 신앙의 맥을 이어온 것은 80년대 이전에는 가정교회였다.

-얘기를 듣고 있으니, 7.4남북공동성명이라든지 80년대 후반 민주화라든지 남북한의 정치적 관계가 좋을 때에 북쪽의 교회도 발전했던 것 같다.

 그렇다. 제가 WCC도서관에서 중요한 문서를 발견했는데, 남북 정부가 7.4공동성명을 내자 WCC총무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에게 축전을 보냈다. 몇줄짜리 전보를 발견했다. 그게 1972년이다. 그 전보를 보고 남한에서는 외교부 장관이 답장을 보냈는데,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직접 고맙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 전보를 통해서 WCC와 북한이 1974년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것이 북한과 WCC가 관계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1974년 여름에 조그련이 WCC에 편지를 보내서 남한에서 종교자유 탄압, 박정희 정부의 독재 정치로 남한 기독교인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WCC가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그게 WCC 가입 신청서로 잘못 알려졌다. 조그련은 WCC에 가입신청을 한 적이 없다.

 어쨌든 7.4 공동성명이 WCC와 북한 교회가 관계를 맺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88년 봉수교회가 생긴 것도 88 올림픽 때 남북 공동개최가 논의가 된 적이 있는데, 북한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봉수교회를 만든 측면이 있다. 80년대 계속 글리온회의를 통해 남북기독교인이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교회 건물의 필요성을 촉구한 것도 한 요인이 됐다.

 -책에서 인상적인 것이, 특히 북한교회와 관련해 주체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공존 문제를 자세히 적었던데.


 1980년대 이후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외국의 기독교인들을 만나면서 주체사상과 기독교에 공통분모가 있다는 얘기를 한다. 황장엽씨가 김일성대 총장에 있을 때도 외국에서 온 기독교인을 만난 자리에서 종교와 주체사상의 관련성을 질문한다. 또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종교와 주체사상 간에 공통분모가 많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특히 1,2권에는 자기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인간적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종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흐름이 북한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그 직전에 성경과 찬송가가 간행됐다. 1980년대는 남한 교회와 북한교회의 전환점이었다. 남쪽에서는 교회성장과 민주화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성과를 올렸다. 또 많은 해외선교사를 보내면서 남한교회 역량을 과시했던 시기다. 그 시기 북한도 교회 재건을 했다.

 -평소 궁금했던 부분 중 해외선교 관련해 김선일, 아프간 사태를 교회사가들이 어떻게 정리됐을까 궁금했는데 그 내용이 없더라.

 200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다루지 못했다. 선교는 2000년대 이전까지만 다뤘다. 선교를 다루면서 저희가 하나는 한국교회의 세계 경험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경험을 세계인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또 선교학자나 교회에서 선교자들을 보내면서 준비시키지 못하고 부작용이 나타난 것도 얘기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회들이 요즘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으니까 좀 더 자세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에 에너지를 쏟은 것은 2000년대 이후다. 곧 개정판을 낼텐데 한국교회의 힘을 부각시킬 것이다.

 -해외선교를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게, 한국교회의 힘이 대단하구나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우리 울타리에 갇혀있었다, 우리가 배울 것, 좀더 보편적으로 나아갈 부분도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교회가 전환기를 살고 있는데 지난 120년은 한국인의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시기였다. 최근 해외선교사 보내면서 한국적 기독교를 다시 세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경험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텐데, 한국교회를 보편적인 교회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물론 외국에 복음을 전하는데도 기여하지만, 한국교회에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초기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아파한 역사였다. 반면 최근에는 배척받는 경우가 많다. 국민의 마음, 민족사와 다소 유리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족의 대안적 종교로 출발했던 기독교가 이렇게 바뀐 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지,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나.


 한국교회가 민족사에 긍정적으로 참여한 것이 3.1독립운동, 또 70년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그 뒤 통일운동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기독교가 한국적 기독교로, 또 외래종교에서 민족종교로 이미지를 바꾸고 민족사에 깊이 관여했다. 또 한쪽에서는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에 치중하면서 자기교회 확장에 기울어져 민족사의 문제에 무관심해지고 교회 재정도 자기교회를 위한 일에 투자하게 되면서 교회는 성장하고 교인도 늘어나는데 한국사회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기여가 적어졌다.


 -3.1운동, 통일운동이 교회성장인 면과 왜 결합하지 못했을까.

 역시 19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교회가 산업화 시기였고 빈부격차가 생기면서 그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보다는 그날그날 위로해주고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를 더 선호했다. 일부는 제도의 개선,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졌지만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날 그날 먹고사는 것에 지쳐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위로와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다. 그런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기자로서 요즘 사회를 보면서, 또 책을 보면서 느끼는게 교회 안의 갈등이나 문제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 문제와 거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신도의 한사람으로서 드는 생각은, 교회가 일치와 화해 용서를 얘기하는 곳인데, 왜 사회의 양극화를 넘어 왜 대안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까하는 상념이 든다.

 

(어리석은 질문이겠지요. 현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존재할 수 있는 집단이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역사가 앞에서 한번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때론 어리석은 질문에 예상 못했던 지혜로운 답변이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해 저희가 뒷부분에 썼는데, 남북분단과 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국사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에 따라 좌냐 우냐 급격히 구분됐다. 그런 경향이 교회에 깊이 침투하면서 결국은 신앙보다 이데올로기가 더 우세한 그런 기독교가 됐다. 예컨데 원수를 사랑하고 성서에는 써 있지만 설교에서는 여전히 북한을 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는 성서적 가르침보다 이데올로기가 더 우세해졌다. 그래서 남한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반공적인 교회가 됐다. 전쟁을 겪으면서 생존이 당장 가장 큰 과제가 되면서 개인차원에서는 교회가 개개인에게 생존의 힘을 주기 위해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가 나왔고, 남한 공동체 차원에서는 반공 메시지로 남한 공동체의 생존을 우선시하게 됐다. 한국기독교는 성서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남한 공동체와 개개인의 성장을 많이 반영하게 됐다. 그것이 1945년 이후 한국교회의 특징이 됐다.

 (신앙보다 이데올로기가 더 우세한 기독교가 됐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건 다소 저널리스틱한 질문인데, 한국교회 현대사에서 베스트 장면과 가슴 아픈 장면을 꼽는다면?

 시기로 보면 1980년대가 가장 한국교회의 힘, 한국기독교의 과제를 가장 잘 보여준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교회성장을 통해 복음전도에 치중했고 그것이 세계선교로 이어졌다. 또 한편으로는 민족사의 과제에 가장 많이 헌신했다. 그것이 1980년대에 완결이 됐다. 신학적으로도 민중신학을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는 가장 활기찬 시대였다.

 -아쉬운 대목은?

 한국기독교의 신앙이 많이 축적이 됐는데, 한국기독교인들이 많이 공감하는 신학이 나와야한다. 토착화 민중 신학이 나왔지만 성도 대다수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점이 아쉽다. 장차 한국교회가 세계 신학계에 기여할 바가 있다면, 6.25 전쟁의 참상, 그것이 반영된 평화와 화해의 신학을 제시하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다종교 사회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종교와 관련을 맺고 선교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세계 신학에 기여할 수 있다.

 

 또 역시 지난 120년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교회가 많은 조직과 제도를 모색했는데 해방이전에 이미 교회법과 제도가 완성이 됐는데, 일제말기에 제도가 다 무너졌다. 또 해방이후 교회분열을 거치면서 또 상처를 입었다. 이런 것이 1970년대까지 계속되면서 197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교회가 성장하면서, 많은 기관이 생기고 교권이 생기면서 교권의 욕망이 급증했는데, 그런 교권욕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다. 그런 교회의 내실과 질서를 정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1980년대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도 사실 당시에는 교회 안에서 널리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교회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평가 받고 있다. 지금 교회 안의 일 중에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 훗날 재평가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있다면?

 1980년대 민주화에 성공한 이후 19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 에너지가 대북지원쪽으로 넘어갔다.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 어려움을 겪을 때 한국기독교의 자산과 에너지를 북에 쏟았다. 이건 한국사회에서 보아도, 다른 어떤 집단에 비해 한국교회가 앞서갔다. 이런 것은 장차 90년대, 또 2000년대 한국기독교의 민족사에 대한 공헌으로 기록될 것으로 본다.

 -또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평신도들 입장에서는 그냥 혼자 신앙생활만 잘해도 되는데 왜 역사를 알아야할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고 또 그분들이 어떤 신앙고백을 했고, 그 신앙을 통해 민족사에 어떤 기여를 했고 어떤 교회를 만들어왔는지, 이런 것을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알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어떤 신앙을 계승할 것인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성찰하게 만들어준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한다고 고백하는데, 한국교회는 그 역사에 제대로 응답했다고 보는가. 역사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교회에 대한 평가 문제인데, 일제시기는 1945년을 기점으로, 그전 60년에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자마자 식민지 경험을 하면서 민족의 생존, 당시 한국인들의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시기에 교회가 중요한 공헌을 한 부분을 많이 인정하고 있다. 일제말기에 신사참배를 한 시기도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전쟁시기에 고통받는 전쟁재난민들을 구호하는데 열심히 했다.

 

 또 그 이후 역사에서도 산업화에 지친 대중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사회 모순에 도전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통해 그런 일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금까지 120년은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판받는 점도 있지만, 줄기차게 앞을 향해 전진해왔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생명력과 민족사에 대한 헌신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앞으로 더 연구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한국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해야할 것이 많다. 하나는 지난 120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 이분들의 생애를 정리할 때가 됐다. 지금까지는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문장으로 정리된 사람은 약 2500명 밖에 안된다. 장차 한국기독교 인명사전을 만들어서 교회와 민족사에 헌신한 이들의 생애를 정리한 기독교 인명사전을 만들어야한다.

 

 또 하나는 1980년 이후 해외선교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는데, 해외선교 활동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의 자료가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또 1945년 이후 북한 지역에서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좀 더 충분히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한다.


 혹시 북한교회 부분의 문제를 쓰려면, 가짜냐 진짜냐는 큰 의미가 없고, 설령 부족한 교회라고 해도 좀더 온전하고 성서적인 토대를 가진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한국기독교의활력은 앞으로 북한선교에 있을 것으로 본다. 교회의 에너지를,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 선교에 가야한다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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