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박쥐 노무현 용산 죽음 구원



 “죽음은 윤리적이고, 삶은 불의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 대중문화를 보면 대중의 잠재의식은 지금, “삶은 불의하고 오직 죽음만이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례를 꼽자면 너무나 많다. 영화 ‘마더’ ‘박쥐’, 드라마 ‘내조의여왕’, 그리고 노무현 장영희 김수환의 죽음까지.


 (영화 마더와 박쥐의 결말에 대한 정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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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cineart.tistory.com

 

 영화 ‘마더’에서 엄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살인을 저지르는 극단의 선택한다. 영화 첫장면에서 홀로 진실하며 고귀하다고 믿었던 모성애의 화신인냥 들판에서 혼자 춤추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부조리를 스스로 잊어버리고자 자기 몸에 침을 놓고는 관광버스 춤판-천박하고 세속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속에 끼어든다. 버스가 달려가는 세상은 거짓 속임 살인 부조리, 온갖 타락한 것들의 세상이다. 그 것을 벗어나는 길은 자신과 아들의 죽음-사회적-뿐이지만, 엄마는 자신으로 인한 희생자 앞에서 통곡할지언정 결코 자신을 희생해 남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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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nae2nyon.tistory.com

 영화 ‘박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희생을 자처했던 고귀한 신부는, 생존을 위해 남의 피를 먹어야하는 뱀파이어가 돼 돌아온다. 그가 돌아온 속세는 거룩한 노동의 현장이아니라 욕정과 살인의 세계다. 신부가 신부직을 버려서 구하고자 했던 여자조차도 거짓된 존재였다. ‘박쥐’의 결말은 ‘마더’와는 정반대지만, 별 의미는 없다. 죄악 그 자체가 된 남과 여가 햇볕을 받아 스러지는 모습에 2009년 대한민국 관객들은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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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zbxe.webice.kr

 드라마 ‘내조의 여왕’도 뉘앙스는 다르지만 주인공 스스로 부도덕한 현실을 자처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이 드라마를 제대로 시청하지는 않았고, 아주 가끔 조금씩 보고 홈페이지에서 시놉시스를 확인했다.). 천지애는 첫사랑을 버리고 재능과 미래가 보장된 남자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의 부도덕함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현실을 그녀는 맨몸으로 돌파해야한다.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이 순정파도 아니고 신데렐라도 아니고 스스로 부도덕을 선택한 인물이라는 점. 이것이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비결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세상이 부도덕하고, 나 또한 그 부도덕들 중 하나라는 점을 이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으니까.

 

 

 그리고 용산 참사가 있었다. 아니,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로 용산참사는 병원 냉동실 안에 얼어붙어 있다. 2009년 대한민국의 총체적 부도덕함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우리 또한 이곳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었고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경찰의 책임이라고? 경찰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고, 청와대는 용산을 포함해 전국의 재개발 조합원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고, 그들의 표를 의식하는 그 사람을 온 국민의 대표로 앉힌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영화 '마더' 속의 김혜자, 영화 '박쥐'의 송광호처럼, 우리에게 지금 삶은 막혔다. 탈출구는 안 보인다.

 

 노무현 장영희 김수환.

 

 잇따른 열광적인 죽음을 보면서,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매혹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노무현 장영희 김수환.

 

 어떤 이들은 이 세 이름을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이들이 동격이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최근 그 죽음을 뜨겁게 찬양했던 이름을 적어본 것일 뿐이고, 거기서 묘한 공통점이 발견됐다.

 

 우리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무관심했고 심지어 그 삶의 끝자락에 침을 뱉기도 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랬던 우리는 그들이 죽자 마자 흰 국화를 들고 조문객의 대열에 섰으며 장엄한 추도사를 쏟아냈다. 거기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었다. 심지어 “왜 추모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그러고보니, 이 죽음들 앞에서도 이념의 잣대를 앞세운 이들은 스스로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었다.)

 

 거룩함으로 칭송되는 죽음은 우리 삶의 누추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야 삶의 실체를 직면했다는 점에서, 그 모습은 진실로 종교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삶의 부조리를 어떻게 용서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죽음에서야 그 탈출구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해석은 어떨까. 1987년 이후 우리 모두가 선의와 고귀한 의지로 만들어온 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이, 그 모든 영웅적 투쟁과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갈라져 내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남의 밥그릇을 빼앗아야 하는 지옥을 만들어냈다는 점, 1%도 안되는 부동산 부자를 위해 종합부동산세는 없애고 낸 세금은 돌려주면서 밥 굶는 아이와 치료 받지 못하는 노인은 버려두고 여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광장은 경찰차로 틀어막는 풍경을 스스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마더’의 엄마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모든 상황에서 홀연히 벗어난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찬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무현의 부활’‘촛불의 부활’‘민중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덧없게 느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부활은 죽어야 사는 것인데,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죽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결국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미사를 비롯한 종교의식으로 마무리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 종교의식은 결국 우리 모두를 가사 죽음을 겪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잠시나마 속죄의 해방감을 주었고 우리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22년전의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직선제 개헌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정의로운 목소리들이었다. 엄혹한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외치는 목소리가 서로를 깨웠다. 낮은 목소리가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고 역사의 물줄기를 잠시나마 바꾸어 놓았다. - 비록 22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또다른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순간에는 충만한 구원이었다.

 지금도 새로운 구호가 나와서 그것을 끊임 없이 챈팅할 때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죽음을 향한 찬탄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게 해주는 구원의 순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럴 때 우리 사회의 '영적 지도자'라는 분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린양들이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기자의 생명은 팩트. 형용사와 부사가 필요 없는, 사실의 나열로 이뤄진 문장이다. 그런데 자꾸만 나의 생각은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해진다. 슬프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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