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똥파리, 그랜토리노 그리고 구원 - 종교영화로 세 작품 읽기

최근에 본 영화들에서 종교에 관한 우리 사회의 사색을 떠올렸다. 아래 글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 양익준의 ‘똥파리’ 그리고 박찬욱의 ‘박쥐’. 3편의 영화에 대한 아래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모조리 포함돼 있다. 스포일러를 밟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실 것.

 

1.그랜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유언과도 같은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전쟁을 통해 삶과 죽음의 극한을 체험한 노인, 월트 코왈스키다. 영화는 그의 부인 장례식에서 시작되는데, 남편인 코왈스키는 젊은 신부가 장례미사에서 삶의 힘겨움을 끝낸 뒤에 올 안식에 대해 설교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코왈스키가 보기에 젊은 신부는 ‘삶과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입술로만 촐삭대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코왈스키에게 삶과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한국 전쟁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소년병의 얼굴에 총을 쏴야했던 경험 때문에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 ‘죽임의 상처’ 때문에 코왈스키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늘 생존과 죽음 사이에 선 고통이었다. 그러니 코왈스키에게 삶과 죽음, 죽임과 생존은 젊은 신부의 생각처럼 분명하게 나뉘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집 앞마당을 밟는 것조차 ‘침입’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라이플을 들 정도로 서부시대를 살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살기 위해 죽임을 선택해야했던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코왈스키의 트라우마는,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했던 미국인들의 트라우마와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트라우마도 건드린다. 오늘 우리의 삶 역시 코왈스키처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영위되고 있는 것이란 걸, 이제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살기 위해 시키는대로 혹은 배운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매순간 가장 정당하고 성실한 선택을 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알

량한 물질의 만족과 육신의 안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노력의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적나라하게 밝혀진 인류의 행적을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 노력의 대가로 삶을 누려왔다기 보다는 누군가를 죽임으로서 생존해왔다.


 

 어디서부터 잘못인건지, 아니 정말 잘못인건 맞는지, 그럼 어떻게 속죄하란 말인지 당황스럽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살아야하는 삶의 모순. 산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하게 되는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이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코왈스키는 타인, 그것도 과거 미국을 위해 희생당했던 몽(정확히는 흐몽Hmong)민족의 남매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해결했다.

 흐몽족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이용했던 종족이었으나 전쟁 이후 철저히 버려졌고 최근에야 미국 망명이 허용되었다고 한다.(출처: 네이버 영화평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1786621)

 나의 생존이 누군가를 죽임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면, 나 또한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선 죽임을 당하리라. 아니, 최소한 나를 통해 생존할 사람에게는 내가 겪은 죽임의 트라우마를 주기 않기 위해, 차라리 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리라.(“난 이미 손에 피를 묻혔으니까..난 이미 더렵혀졌으니까.. 그래서 혼자 가야한다.”)

 코왈스키가 총에 맞아 엎드려져 있는 장면에서 종교적 경건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가진 트라우마에 구원의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뜻밖의 엔딩에 이어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강렬한 여운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휴머니즘’이라고만 말하기엔 의미심장한 결론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식의 ‘더티하리식 정치론’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이 영화의 결론에 깊은 감명을 받게되는 것도, 우리 모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 삶의 모순에 대한 구원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영화가 미국에서 예상 외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는 반갑다.

 

 

2. 똥파리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에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전혀’가 아니라 ‘거의’인 이유는, 주인공의 집에 걸려있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그랜토리노처럼 우리 시대의 생존에 대한 트라우마를 얘기하고 있고, 그랜토리노와는 정반대로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시작도 의미심장하다. 길에서 얻어맞는 여자를 구해준 주인공 상훈은 여자에게도 머리를 때리며 “맞고 다니지 말라”고 욕한다. 맞고 때리고 맞고 때리는 악순환의 고리같은 삶에서 빠져나가라는 일갈은, 용역깡패인 주인공 자신의 삶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상훈은 그 폭력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자신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상훈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여자 연희가 자신이 죽인 여성의 딸이고, 자신을 죽이는 영재 또한 그 여성의 아들이자 연희의 남동생이라는 사실이다. 폭력의 순환을 통해 우리 삶-혹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구원 받을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상훈이나 연희나 모두 아버지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도 상투적이긴 하지만 역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더욱 크게 한다.

 양익준 감독은 구원의 가능성을 가족의 복원,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가족 관계에서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별로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상훈과 같은 이들에게 오늘날의 종교는 어떤 구원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랜토리노 같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영화,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달라고 외치고 있는 똥파리 같은 영화 모두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작품이다.

 

 

3. 박쥐

 ‘박쥐’는 3편의 영화 중 가장 직접적으로 종교를 영화 속에 끌어들이고 있는 영화다. 주인공 뱀파이어 상현이 바로 신부이자 수도사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드물게도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자신의 영화세계 주제로 삼고 있다고 얘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왠지 ‘박쥐’가 ‘똥파리’나 ‘그랜토리노’보다 훨씬 덜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박 감독 스스로 종교가 인간에게 구원의 답을 줄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는 그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교회 신자들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의 전작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더 극단적으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묻는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과 태주는, 친절한 금자씨나 박 감독의 이전 영화의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 열심히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심지어 태주는 그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처럼 보인다(“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어요?”라는 태주의 질문은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 것과 똑같다.).

 

 상현도 “난 더이상 신부가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는 상현이 느끼는 갈등이 단순히 신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욕망(또는 생존)과 타인의 생존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느끼는 보편적인 것이란 점을 일깨운다.


 상현과 태주의 이런 상황은 ‘뱀파이어’라는 장치-내가 살기 위해 남의 피를 먹어야한다- 때문에 ‘그랜토리노’나 ‘똥파리’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 상황을 드러내고 구원의 가능성을 묻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박 감독의 그런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하나의 우화로 읽힌다. 비현실적인 미장센과 장면 묘사-하늘을 붕붕 나는 장면과 상처가 스스로 치유되는 장면의 컴퓨터 그래픽은 전혀 현실감이 없다-에는 모순된 상황에 처한 이의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강우(태주의 남편 신하균)의 어머니 라 여사가 혈압으로 쓰러진 뒤 죽어버리거나 죽임을 당했다면, 태주와 상현의 뱀파이어 행각이 과연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해 보였을까?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며 뱀파이어로 사는 길을 택한 상현은, 과연 태주의 폭주가 없었다면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있었을까? 태주 역시 상현의 선택이 아니라면 죽음으로 내몰렸을 이유가 없다.

 이 영화가 박 감독의 거창한 작품세계에 비해 초라한 치정극-그러나 뛰어난 미장센과 연기, 음악 그러니까 이른바 때깔 때문에 대단한 영화적 쾌감을 주긴 한다-으로 읽히는 이유도, 그래서 박 감독이 말하는 것 같은 구원과 욕망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은 ‘박쥐’ 뿐만이 아니었다. ‘친절한 금자씨’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심지어 ‘복수는 나의 것’ 조차도 하나의 우화처럼 보였지 삶의 참담함을 드러내는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은 아니였다. 심지어 박 감독의 팬들 조차 ‘삶의 구원 가능성을 묻는다’는 박 감독의 말보다는 박 감독이 보여주는 시청각적 쾌감과 영화 플롯에 숨어있는 묘한 브루주아적 스노비즘에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다.

 다시 말해, 박 감독이 진정으로 삶의 구원 가능성을 묻고 싶다면 삶의 참담함을 좀 더 현실감 있게 그려낼 수 있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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